“너는 또 뭐야? 뭣이 어쨌다구?”
진나라 병사가 번쾌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때 노관에게 한 끝이 잡힌 채찍을 놓은 그의 오른손은 벌써 장검을 반이나 빼들고 있었다. 육국(六國)의 쇠로 만든 장검[철검]과 맞부딪혀서도 밀린 적이 없다는 진나라의 청동검이었다. 노관만 해도 만만찮아 보였는데 억세고 험상궂어 보이는 번쾌까지 편들고 나서자 심상찮은 느낌이 든 것 같았다.
아직 천하가 통일된 지 오래지 않아 다른 육국 사람들에 대한 진나라 병사들의 태도에는 승리자나 정복자의 위세가 살아있었다. 거기다가 강화된 진의 법령은 그들에게 집행자로서의 실권까지 얹어주었다. 시황제의 이름으로 부여된 노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인부쯤은 얼마든지 목벨 수 있었다.
“이것들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여기가 어디라고……”
그러면서 눈을 부라리는 진나라 병사가 믿는 것은 바로 진나라의 법령과 자신의 칼이었다. 그렇지만 번쾌에게는 그런 진나라 병사를 겁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일하러 왔고 이제껏 열심히 일해왔소. 형님이 편찮으셔서 못하는 만큼 우리가 더 일하면 될 거 아니오?”
질그릇 깨지는 듯한 소리로 맞받는 그 눈길이 여간 험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먼저 가로막고 나섰던 노관이 난처한 낯빛이 되었다. 빼앗은 형국이 된 채찍을 가만히 바위 위에 내려놓은 뒤 맞서있는 진나라 병사와 번쾌를 번갈아 보며 뭔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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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기묘한 대치가 벌어졌다. 진나라 병사는 금세라도 칼을 빼 칠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번쾌 역시 나도 빈 손은 아니라는 듯이 망치 자루를 슬그머니 힘주어 잡으며 그 눈길을 맞받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혀 불똥을 튀기는 듯했다.
끝내 참지 못한 진나라 병사가 칼을 빼서 번쾌를 후려쳤다. 번쾌가 기다렸다는 듯 망치를 휘둘러 칼을 쳐냈다. 어찌나 세게 쳐냈던지 간신히 칼을 잡고 있는 진나라 병사의 몸이 심하게 휘청거렸다. 칼과 망치가 부딪는 모진 쇳소리에 둘레의 일꾼들이 모두 일손을 놓고 그들 쪽을 쳐다보았다.
거기다가 노관도 더는 보고만 있는 자세가 아니었다. 갑자기 유계를 가로막으며 번쾌를 편들어 덤빌 듯한 기세였다. 가까운 곳에 저희 편이 없는 데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고 있는 일꾼들까지 유계를 편드는 듯 보였던지 진나라 병사 쪽이 먼저 기세가 꺾였다. 뺐던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 넣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좋다. 너희들이 이젠 떼를 지어 우리 진나라와 황제 폐하께 맞서려 드는구나. 내 반드시 장군께 아뢰어 너희 세 놈을 한 구덩이에 산 채로 묻어주겠다.”
말은 그래도 뭔가 감당 못할 기세에 밀려 물러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때 얼른 정신을 차린 노관이 평소의 약삭빠름을 되찾았다. 가만히 그 병사의 옷깃을 잡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러십니까, 나으리. 저희가 어찌 감히 나라에 맞서겠습니까? 불찰이 있었더라도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품안에서 꺼낸 작은 은덩이를 병사에게 쥐어주었다. 하지만 그 병사는 성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차갑게 노관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까지도 바위 위에 느긋이 앉아 있던 유계가 그리 높지 않은 목소리로 그 병사를 불렀다.
“이보시오.”
성난 눈길로 돌아보던 병사가 그런 유계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굳은 듯 멈추어 섰다. 유계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런 진나라 병사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고향 동무들과 멀리서 부역을 나오긴 했소만, 몸에 익지 않은 일이라 어찌 해볼 수가 없구려. 그래도 이 동무들이 힘을 다해 나라 일을 크게 그르치진 않았을 것이오. 너무 성내지 마시오.”
그러고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번쾌에게 내밀었다.
“이걸 저 사람에게 전해주게. 이번에 떠나올 때 소하(蕭何)가 준 것이네.”
“아니, 형님 이걸 모두……”
타고난 무골(武骨)이기는 하지만 그 몇 년 저잣거리에서 개백정 노릇을 하는 동안에 셈에도 밝아진 번쾌가 주저하면서 물었다. 패현을 떠나올 때 유계와 알고 지내던 다른 현리(縣吏)들은 전별금으로 3백 전(錢)을 주었으나 소하만은 5백 전을 내놓았다. 유계는 그걸 따로 싸서 품에 넣어 다니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제 그 적지 않은 돈을 선뜻 내놓은 것이었다.
“소하가 이럴 때 쓰라고 준 것이다. 어서 주어라.”
그 말에 번쾌가 마지못해 전대를 그 병사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그 병사에게 일어난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이나 선선히 번쾌가 내미는 것을 받은 뒤 공손히 유계를 올려 보았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有錢用神] 했던가, 얼른 보기에는 뇌물의 힘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참이나 유계를 바라보던 병사가 스스로 그 앞에 다가가더니 받은 전대를 공손히 올려 바치듯 되돌려 주었다.
“내가 아마도 귀인(貴人)을 알아보지 못했던 듯하오. 도두(徒頭)라 하셨던가요? 일꾼들을 데리고 오신 분이라면 꼭 몸소 일하지 않아도 되오. 다만……”
마치 유계의 아랫사람이나 된 듯 말투부터 공손하기가 그지없었다. 알 수 없기는 유계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렸다는 듯 전대를 넙죽 받아 다시 품에 넣으며 물었다.
“다만, 뭐요?”
“황제폐하께서 순시를 오신다는 전갈이 있으셨오. 그때는 일어나셔서 일꾼들을 독려하시는 척이라도 해주셨으면 하오.”
“시황제께서 친히 여기까지 나오신다?”
“그렇소. 이 공사는 수도 함양성의 해자(垓字)가 되는 것이라 황제폐하께서 그 어떤 일보다도 중히 여기시오. 이곳은 처음이지만, 황제폐하께서 노역장에 나오신 것은 이번 여름에만도 세 번이나 됩니다.”
“그랬었소? 거 참, 볼 만하였겠소. 그래, 오늘은 틀림없이 이곳에 오신다고 하오?”
유계는 조금 전의 일은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기대에 차서 물었다. 꼭 무슨 큰 구경거리를 두고 들떠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데가 있었다.
“그런 것 같소. 우리도 장졸을 가리지 않고 모두 제자리를 지키라는 엄명이 내려왔소.”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물길 바깥쪽 양쪽 둑 위로 보얗게 먼지를 날리며 기마 몇 필이 달려나왔다. 검은 영기(令旗)를 앞세운 것으로 보아 급한 전갈을 가지고 달려온 파발마 같았다. 말고삐를 당겨 멈춰선 소교(小校)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들어라. 잠시 후에는 황제폐하의 행차가 이르실 것이다. 노역을 감독하는 사졸(士卒)들은 역도(役徒)들이 일터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역도들은 각기 하던 일에 전심하여 터럭만큼도 어지러움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함부로 자리를 뜨거나 소란을 피워 목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일꾼들 중에는 그곳으로 끌려오기 전 고향에서 이미 시황제의 순수(巡狩)를 구경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먼 빛으로나마 시황제를 보게되는 게 처음이었다. 모두 일손을 멈추고 도성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벌써 부연 먼지가 하늘을 가린 게 황제의 행차가 가까웠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임금이 나다닐 땐 사(師〓2천 5백 명)가 따르고 경(卿)이 나다닐 때는 여(旅〓5백 명)가 따른다. 천자의 순수에는 규모가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순수가 아니라 도성 밖 행차에 지나지 않아서인지 그 날 시황제를 따르는 군사는 사(師)를 크게 넘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의장(儀仗)은 여느 순수 때보다 훨씬 더 호화스러웠다.
진나라의 빛깔인 검은 바탕에 금실로 용을 수놓은 깃발을 앞세운 기마대에 이어 번쩍이는 창검에 온 몸을 철갑으로 두른 보졸(步卒)의 행진이 따랐다. 다시 갖은 색깔의 현란한 깃발을 든 의장대가 시황제가 들어있는 행렬의 앞머리를 장식하고, 그 뒤를 백관(百官)과 궁녀며 내시들이 화려한 차림으로 에워싸 황제의 위엄을 드높였다.
그 한가운데서 느릿느릿 다가오는 게 말로만 듣던 온량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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