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一. 四海는 하나가…(17)

  • 입력 2002년 8월 15일 16시 37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亡命 ①

진나라는 다섯 집[오호]을 묶어 한 인(隣)으로 삼고, 다시 다섯 인[五隣]을 묶어 1리(一里)라 했다. 그리고 10리마다 하나씩 정(亭)을 두어 정장(亭長)이란 낮은 벼슬아치에게 맡겼으니, 정은 곧 진나라에서 가장 낮은 행정단위인 셈이다.

정은 원래 관용(官用)객사로서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들이 묵는 집이었다. 정장은 그 집의 책임자로서 오가는 관리들을 접대하는 게 가장 큰 일이었으나, 때로는 정에 딸린 번졸(番卒) 들을 데리고 좀도둑을 잡으러 나서기도 했다. 번졸이랬자 구도(求盜)와 정보(亭父) 둘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들과 치안을 맡을 때는 정장도 제법 관리 같은 데가 있었다. 또 정장은 마을 사람들 사이의 작은 시비[爭訟]를 가려주는 일도 해서 그때는 이장(里長)과 비슷했다.

사수군(四水郡) 패현(沛縣) 동쪽에 사상(泗上)이란 정이 있었다. 시황제 37년 늦봄 어느 날이었다. 머지않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큰 변괴를 앞두고 있었으나 폭풍우 전야의 고요함이라 할까, 세상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상정(泗上亭)도 아직은 조용하기만 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기와로 지붕을 덮고 회칠한 담장을 지닌 정(亭)에는 그날 따라 묵고 있는 관리가 하나도 없었다. 가을걷이 뒤의 넉넉함 덕분일까, 마을에는 좀도둑도 뜸하고 시비도 일지 않았다. 이에 번졸들은 저마다 일을 핑계로 정을 빠져나가고 정장인 유계(劉季) 혼자만 남아 대껍질[竹皮]을 벗기고 있었다.

유계가 껍질을 벗기고 있는 대나무는 패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한 대나무가 아니었다. 구도(求盜)를 멀리 산동의 설(薛)땅까지 보내 구해온 그곳 특산물로서, 대껍질이 질기고 유난히 반질거렸다. 유계는 그 대껍질을 가늘게 쪼갠 것[竹絲]으로 관[冠]을 만들어 썼는데, 나중에 천자가 된 뒤까지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뒷사람들이 이른 바, 유씨관(劉氏冠)이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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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평민들은 머리에 관을 쓰지 않고 건(巾)이란 천 조각으로 머리카락을 묶었다. 관은 원래 제후나 대부(大夫)들이 쓰는 엄중한 복식(服飾) 중에 하나였고, 벼슬이 없다 해도 학문하는 선비[士]는 되어야 관으로 검은머리[黔首]를 가릴 수 있었다. 그런 시절에 유계가 세상에 있지도 않은 관을 만들어 쓴다는 것은 그의 특이한 개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드디어 자신을 저잣거리를 헤매는 여느 백성과 다르게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계가 스스로 선비[士]에 자리매김 하게 된 것은 그가 몇 해 전부터 맡게 된 정장(亭長) 일과 무관하지 않다. 기록에는 유계가 시험을 치러 그 자리를 따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정장이란 벼슬이 그 아래로는 아무도 없는 말단 중에도 말단이니 그 시험이란 게 또한 뻔했다. 임용을 작정한 현령이 겨우 문맹(文盲)이나 면한 응시자를 불러 몇 가지 훈계를 주고 다짐을 받는 정도였다.

유계가 그 자리를 얻게된 데는 소하(蕭何)의 힘이 컸다. 칼로 장난을 치다가 현청의 막일꾼인 하후영을 다치게 한 탓에, 노관 번쾌와 함께 함양(咸陽)에서 마음에도 없는 부역을 1년이나 살고 패현으로 돌아온 지 며칠 안 되어서였다. 술상을 차려놓고 유계를 부른 소하가 언제나 그러하듯 차분한 목소리로 권했다.

“유형(劉兄). 이제 더는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하찮더라도 구실을 맡아보시는 게 어떻겠소? 마침 사상정(泗上亭)에 정장 자리가 비었으니 뜻이 있다면 내가 한번 주선해 보리다.”

“정장이라 - 그럼 나더러 일없이 오락가락 하는 관리 놈들 뒤나 닦아주라는 건가?”

유계는 처음 그렇게 빈정거리며 마다했으나 소하가 워낙 간곡하게 권해 마음을 바꾸었다. 그때 이미 유계는 소하에게서 단순한 우의(友誼)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소하의 말은 언제나 빈틈없는 사려 뒤의 충언이었고, 그때 그때의 난처한 국면을 헤어나게 하는데 그치지 않은 충심 어린 보필이었다.

유계가 허락하자 소하는 그날부터 소리 소문 없이 현청(縣廳) 위아래로 손을 썼다. 그리고 며칠 뒤 시험이랄 것도 없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유계를 정장 자리에 앉혀놓았다. 유계가 스스로 관을 만들어 쓰게된 것은 그 뒤라, 하찮지만 그 벼슬이 어떤 자각을 주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 실로 돌이켜볼수록 알 수 없는 이가 그 모든 일을 주선한 소하였다.

소하는 패현 풍읍(豊邑) 사람으로 유계와 같은 현을 고향으로 삼고 있었지만, 그밖에는 특별하게 그들 둘을 얽고 있는 인연이 없었다.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소하는 조용하고 침착한 성품이라 남의 눈에 띄지 않았으나 일찍부터 형법과 율령(律令)에 통달했다. 자라서는 현청에서 일했는데, 출발은 주리(主吏〓功曹)의 낮은 구실아치로부터였다.

소하와 유계가 처음 만난 것은 유계가 풍읍을 거쳐 패현 성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뒤가 된다. 그 무렵 옥사(獄事)를 맡고 있던 소하는 우범자(虞犯者) 또는 잠재적 범인으로서 유계를 감시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입안의 혀같이 구는 노관(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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