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노라. 경(卿)의 말을 믿겠다. 만사를 반드시 짐의 위엄과 권능에 어울리게 처결하겠다. 다만 앞으로는 경뿐만 아니라 누구도 병이나 죽음이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일후 내 귀에 그 말이 들리면 모반의 죄를 물을 터이니 그리 알라!”
그리고 다시 덧붙였다.
“활과 쇠뇌는 그대로 뱃전에 걸어 두라. 경의 말을 따라도, 귀신의 우두머리인 제(帝)로서 하찮은 잡귀(雜鬼)를 벌하는 것인데 무엇이 놀랍고 무엇이 두렵단 말이냐? 앞으로도 큰 물고기나 교룡이 떠오르면 쏘아 그것들을 조짐으로 삼는 요망한 물귀신을 벌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만으로 막을 수 없는 게 병이고 죽음이다. 그날 이후 시황제 주위에서는 아무도 병과 죽음을 말하지 않았으나, 시황제의 병은 점점 깊어지고 죽음은 나날이 가까워졌다.
순수(巡狩)행렬이 하북(河北) 사구(沙丘)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지간한 시황제도 드디어 자신의 병이 깊었으며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임을 짐작했다. ‘왜 황제인 이 나까지도 죽어야 하는가’ 라는 분노에서 ‘나를 죽지 않게 해준다면 무엇이든 하겠다’ 는 절대자와의 타협은 어쩌면 시황제가 방사(方士)들을 가까이 하고 그들로 하여금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선약(仙藥)을 찾게 하면서 줄곧 이어진 감정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끝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비로소 시황제는 후사(後嗣)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호모엑세쿠탄스! 인터넷으로 연재하는 이문열 문학의 결정판! 지금 읽어보세요. |
시황제에게는 스무 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부소(扶蘇)였다. 사람됨이 어질고 너그러웠으나, 시황제에게는 오히려 그런 부소의 인품이 못마땅했다.
진나라는 수덕(水德)에 의지하기 때문에 강인하고 엄혹하며, 모든 일을 법에 의하여 처리하고, 인의나 은덕, 관대 따위가 없어야 오덕(五德)의 명수(命數)에 맞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시황제에게는 부소의 어짊이 나약으로만 비쳤고, 너그러움은 소심(小心)으로 여겨졌다. 거기다가 나이가 차서는 제법 치국(治國)의 식견을 보이며 간언(諫言)을 했는데, 그게 또 자주 시황제의 심기를 건들었다.
그들 부자를 멀리 갈라놓은 이태 전의 간언도 그랬다. 방사(方士)인 노생과 후생이 진시황을 비방하고 달아나자 노한 진시황은 어사(御使)를 시켜 함양 성안에 남아있는 요망한 방사와 서생(書生)의 무리를 잡아들이게 했다. 그러자 겁을 먹은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여 잡혀온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시황제는 친히 판결에 임하여 그들 중에 죄 있다고 여겨지는 자 4백 6십 명을 모두 산채로 땅에 묻게 했다. 그런데 그들은 거의가 방사보다는 선비라 흔히 그 일은 선비를 묻은 일[갱유]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 전해에 있었던 책 태우기[焚書]와 더불어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하여 시황제의 손꼽히는 폭정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때 부소가 나서서 간언했다.
“이제 막 천하가 평정되었으나 먼 지방의 백성들은 아직 우리 진나라에 마음으로 귀속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선비들이 <시(詩)>와 <서(書)> 외며 공자를 본받고 있음은 상하의 예(禮)를 세우며,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도 이제 폐하께서는 법을 엄히 하시고 형벌을 무겁게 키우시어 그들을 얽어매시니, 소자는 이로 인해 천하가 어지러워질까 봐 두렵습니다. 부디 굽어 살피시옵소서.”
두터운 은덕을 베푼 자신을 오히려 비방하고 달아난 방사 노생과 후생의 무리만으로도 치를 떨었던 시황제였다. 거기다가 죽어가면서도 악을 쓰며 대들던 선비들에게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 있던 시황제에게는 그런 부소의 말이 약하고 못나빠진 소리로만 들렸다. 엄하게 부소를 꾸짖은 뒤에, 상군(上郡)에서 대군을 이끌고 있던 장군 몽염(蒙恬)을 감시하란 구실로 도성에서 내쫓아 버렸다.
그 뒤 시황제가 아들 중에 총애한 것은 막내아들 호해(胡亥)였다. 겉으로 보아서는 호해도 강인하고 엄혹하지 못하기로는 부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호해는 남달리 영민한데다 변화에 응할 줄 아는 기민함이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조고에게 법령을 배우게 하였는데, 듣기로는 방대한 진의 법령을 거의 다 꿰고 있다고 했다. 이번 순수에도 아들 중에 유일하게 따라온 게 호해였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보니 역시 자신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는 부소를 넘어서는 아들이 없었다. 특히 호해는, 비록 그 자질이 영민하다 하나 그릇의 크기는 부소에게 크게 미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둘째, 셋째도 아닌 막내아들이었다. 적장자(嫡長子) 계승의 원칙을 어겨가며 제위를 물려주어야 할만큼 빼어난 황제감은 아니었다.
“누구 없느냐?”
황하 북쪽으로 펼쳐진 모랫벌을 느릿느릿 지나가는 온량거 안에서 신열에 들떠 있던 시황제가 문득 사람을 찾았다. 시황제의 변덕을 못 이겨 휘장 뒤에 숨어있던 환관 하나가 그림자처럼 조용히 침상 앞에 나와 섰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를 불러들이고, 흰 비단과 필묵을 준비하라.”
그렇게 명한 시황제는 조고가 들기 바쁘게 그에게 일렀다.
“태자 부소에게 글을 내리고자 한다. 받아쓰라.”
조고가 눈길 한번 마주침이 없이 흰 비단을 펼치고 붓을 들었다. 시황제가 자꾸 가빠오는 숨을 가다듬으며 불러나갔다. 가슴 가득 할말이 있었으나, 길게 이어갈 수가 없었다.
<짐은 너 부소에게 짐에게서 비롯되어 만세(萬世)를 이어갈 황통(皇統)을 넘기노라. 너는 군대를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서 나의 영구를 맞아 장사지내라.>
대강 그렇게 이르고 나니 다시 숨이 가쁘고 정신이 혼미해 왔다.
“이뿐입니까?”
그때 조고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말간 눈을 들어 시황제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만하면 될 것이다. 경은 부새령(府璽令)을 겸하고 있으니 그 글에 옥새를 놓아 짐의 조서임을 명백히 하고 봉하라.”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더 묻는 법이 없이 조고가 대답했다. 그러는 얇은 입술에 무언가 뜻 있는 미소 같은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시 신열로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는 시황제에게는 그걸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다만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조고에 관한 기억과 정보들을 몽롱하게 더듬고 있을 뿐이었다.
조고는 진나라 왕성(王姓)인 조씨(趙氏)의 먼 곁가지였으나, 그 아비가 궁형(宮刑)을 받고 어미는 관비(官婢)가 되면서 비천해졌다. 특히 조고의 어미는 남편이 구실을 못하게 되자 다른 사내와 사통(私通)하여 조고 형제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형제 모두 일찍이 거세를 당하고 환관이 되었으므로, 그들 형제가 은궁(隱宮)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생겼다.
시황제는 조고가 비록 환관이지만 재주가 뛰어나고 아는 것이 많음을 보고 일찍부터 곁에 두고 부렸다. 조고는 법령에 밝은데다 윗사람을 모시고 아랫사람을 부리는데 아울러 능했다. 오래잖아 시황제의 신임을 얻어 중거부령(中車府令)에 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야심도 만만찮아, 남몰래 막내 공자 호해와 가깝게 지내며 재주와 정성을 다해 법령과 송사(訟事)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한번은 조고가 큰 죄를 지어 고발된 적이 있었다. 시황제는 장군 몽염의 아우인 몽의(蒙毅)에게 조고의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몽의는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해 조고에게 사죄(死罪)를 내렸으나, 황제가 총애하는 자라 차마 죽이지 못하고 환적(宦籍)만 삭탈하였다.
얼마 뒤 시황제는 조고의 능력과 재주를 아껴 그나마 용서하고 조고의 관직을 되돌려 주었다. 하지만 조고는 자신을 감싸주지 않고 법대로 처결했다하여 그때부터 몽의뿐만 아니라 대를 이은 장군가(將軍家)인 몽씨(蒙氏)집안 전체에 앙심을 품었다. 몽의의 형이 되는 몽염에게도 감정이 좋지 않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날 시황제가 정신을 잃기 전에 본 조고의 미소도 몽씨들에 대한 해묵은 앙심과 무관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 시황제의 글은 유조(遺詔)인 듯한데, 옥새를 놓고 봉인하라 했을 뿐 사자에게 주어보내라 하지 않았으니 조고는 한시름 놓게 되었다.
시황제가 붕어하기 전에 조서가 상군(上郡)에 이르고, 이를 받든 부소가 함양으로 돌아와 황제로 즉위라도 하게되는 날이면 큰일이었다. 듣기로 지난 이태 곁에서 모시면서 몽염은 장군으로서 부소의 신임을 샀고, 함양에 있는 몽의는 몽의대로 조정 대신들의 마음을 사 꼼짝없이 몽씨들의 세상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록 옥새가 찍히고 봉인되었다 하나 아직 조서가 자기 손에 있으니 달리 틈을 노려 볼 수 있을 듯도 했다.
조고가 은근히 바란 대로 시황제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다음 날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겨우 쉰이었다. 어떤 이는 시황제의 그같은 단명(短命)을 약물중독 때문이라고 본다. 젊어서부터 불로단(不老丹)이네, 불사약이네, 하는 방사들의 말에 속아 함부로 써온 약물에는 수은이나 비소(砒素)같은 중금속과 독극물이 섞여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렇게 갑작스레 시황제가 죽자 전날 유조를 남겼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은 조고뿐이었다. 거기다가 평소 그 거동을 은밀히 해온 탓에 시황제의 죽음을 아는 사람조차도 다섯 손가락을 넘지 않았다. 공자 호해와 승상 이사, 그리고 중거부령 조고에다 평소 온량거 안에서 시황제를 모시던 환관 두엇이 고작이었다.
이사는 시황제가 도성을 떠나 천하를 돌아보던 중에 죽었고, 또 정식으로 태자를 책봉한 적이 없음을 걱정하여 우선은 그 죽음을 백관들과 장졸들로부터 숨기기로 했다. 유해를 온량거 안에 놓아둔 채로 백관들이 정사를 아뢰고 식사를 올리기를 전과 다름없이 하게 했다. 백관들에게는 유해를 모시고 있는 환관이 황제의 명을 전하는 시늉을 하고, 결재는 조고와 이사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 황제를 대신했다.
그같은 대처는 승상인 이사로서는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으나 조고에게는 못된 꾀를 펼칠 틈을 준 꼴이 되었다. 시황제의 죽음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입막음을 하기 바쁘게 조고는 옥새가 찍힌 시황제의 유조를 들고 호해를 찾아가 말하였다.
“황제께서 붕어하셨지만 여러 공자들 중 누구에게 제위를 넘기신다는 조서가 없고 오직 맏이 되시는 부소 공자에게만 글을 남기셨습니다. 부소 공자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선황(先皇)의 적장자(嫡長子)가 되시니 곧 제위에 오르시게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막내인 공자께서는 한치의 땅도 가지실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문열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