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沛公 일어나다(4)

  • 입력 2003년 1월 16일 18시 05분


"이렇게 하자!”

이윽고 유방이 퍼뜩 생각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저마다 생각에 잠겼던 소하와 번쾌 등이 기대에 찬 눈으로 유방을 쳐다보았다.

“성안에 있는 우리편을 쓰자. 그들을 보태면 우리가 현령보다 머릿수가 많다”

“성안에 있는 우리편?”

노관이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거리며 되물었다. 유방이 그런 노관을 무시하고 소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형(蕭兄)의 글 솜씨를 좀 빌려야겠소. 비단 몇 폭을 구해 글을 쓴 뒤 화살에 묶어 성안으로 쏘아 보냅시다”

“무슨 글을… 쏘아보내시려 하시오?”

소하가 얼른 짐작이 가지 않은 듯 물었다. 유방이 한층 기운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성안의 나이 드신 어른들[부로]들에게 호응을 당부해봅시다. 그들은 몸이 성안에 갇혀 어쩔 수 없이 현령을 따르고 있을 뿐 마음은 우리편이오. 그들이 들고일어나면 우리는 현령보다 훨씬 많은 군사를 가진 셈이 되니 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소!”

“알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도 한 좋은 방도가 되겠습니다.”

그제야 유방의 말을 알아들은 소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받았다. 그때 다시 노관이 꾀를 보탰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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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이 효과를 보려면 먼저 패현 성부터 에워 싸야할 거다. 장정들에게 시켜 깃발을 많이 만들어 세우고, 가까운 마을 사람들을 모아 함성을 보태게 하여 되도록 우리 군사가 많은 듯이 꾸미자. 또 마소를 많이 빌어 그들이 일으키는 먼지와 울음소리로 기마(騎馬)까지 갖춘 것처럼 하자. 그래야만 성안 사람들이 우리를 믿고 일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유방은 그 말을 따랐다. 번쾌와 주발등을 시켜 장정들을 몰아 성을 에워싸게 하고 자신은소하와 함께 성안으로 쏘아보낼 격문을 지었다.

<패현 성안에 계신 어르신들께 유계가 삼가 아룁니다.

천하의 뭇 백성들이 진나라의 학정으로 괴로움을 겪어온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어르신들께서는 현령을 위해 외로운 성을 지키고 계시나, 전국의 제후들이 모두 들고일어났으니 머지않아 이곳 패현에도 밀려들 것입니다. 성안의 여러분께서는 모두 힘을 합쳐 현령을 죽인 뒤에 재주 있고 덕 많은 젊은이를 우두머리로 세워 제후들에게 호응하도록 하십시오. 그리한다면 가솔과 재산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 것이나 그리하지 못하면 아비와 자식이 한 가지로 헛되이 죽음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내용을 정한 뒤에 소하가 깎은 듯한 글씨로 비단에 써 내려갔다. 그리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그 비단 폭을 화살에 묶고 성안으로 쏘아보냈다.

그런데 화살을 쏘아보내기를 다섯 대나 하였지만 갚은 우물에 바늘 떨어진 듯 패현 성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삼경이 다되도록 성벽 위의 횃불과 화톳불만 휘황할 뿐이었다.

“바보 같은 것들 뭣하고 있는 거야? 평소 그렇게 으스대던 뚝심 다 어디 두고 비리비리한 현령 한 놈 해치우지 못해?”

먼저 번쾌가 그렇게 투덜거리며 성안에 남은 저자거리 건달들을 나무랐다. 세밀한 만큼 소심한 소하도 삼경을 넘기자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일이 잘못된 게 아닐까요?”

“현령을 죽이는 일이 그리 쉬울 리가 있겠소? 좀 더 기다려 봅시다.”

무얼 믿고 그러는지 유방이 태평스럽게 소하의 말을 받았다. 바로 그때 요란스럽게 함성이 일며 성문 근처에서 잠시 창칼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문루(門樓)가 횃불로 훤히 밝아지며 누가 큰 소리로 외쳤다.

“유씨 형님[劉兄哥]은 어디 있소? 무씨(武氏) 어른께서 찾고 계시오.”

유방이 보니 저자거리에서 가장 형세가 좋은 무가(武哥)네 피륙전에서 점원 노릇을 하는 건달이 기세 좋게 외치고 있었다. 그 곁에는 성안 무씨 집안의 어른 되는 무태공(武太公)이 집안 젊은이에게 뭔가를 들린 체 서 있었다. 유방이 말을 탄 체 불빛 아래 나가 섰다.

“유계는 여기 있소. 무슨 일로 나를 찾으시오?”

그러자 문루 위의 사람들이 이리저리 횃불을 비춰가며 유방을 살폈다. 그러다가 무태공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유(劉)대협. 여기 현령의 목과 인수(印綬)가 있소. 먼저 현령의 목을 내려보낼 터이니 그게 맞거든 성안으로 드시어 우리 패현을 지켜주시오!”

그리고 문루 위에서 현령의 목과 인수가 떨어졌다. 소하와 조참이 현령의 목을 확인하기도 전에 유방이 성문 앞으로 말을 몰았다. 노관이 유방의 말고삐를 잡았다.

“속임수가 있을 지 모르니 현령이 목이 맞는지 아닌지 먼저 알아보고 가자”

그러나 유방은 박차로 말 배를 차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패현의 부로(父老)는 다 나의 부모요 군민(軍民)은 모두 나의 형제다. 부모 형제가 하는 일에 무슨 속임수가 있겠느냐?”

그리고는 앞장서서 성안으로 들어갔다. 소하와 번쾌 등이 장정들을 이끌고 뒤따라 성안으로 들자 패현의 부로들이 유방에게 인수를 바치며 말했다.

“여기 패현의 인수가 있습니다. 대협(大俠)께서는 이제 패공(沛公·패현 현령)이 되시어 우리를 지켜 주시오”

언제나 태평스런 얼굴에 부드럽기만 하던 유방의 표정이 무엇 때문인지 일시에 굳어졌다.

“바야흐로 천하가 어지러워지니 제후들이 다투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때 무능한 사람을 장수를 세우면 싸움에 무참하게 져서 땅은 짓밟히고 사람은 죽거나 다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 어르신의 명을 받들지 못하는 것은 감히 이 한목숨을 무겁게 여겨서가 아니라 아닙니다. 내가 어리석고 힘이 없어 이 땅과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할까 두려워서입니다. 누구를 패공으로 삼는가는 실로 중대한 일이니, 부디 신중하게 고르시어 재능 있는 이를 세우도록 하십시오.”

유방을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처음 보는 신중함이요, 겸손이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유방에게 패공이 되어달라고 거듭 졸랐다. 유방이 다시 사양했다.

“여기 이 소형은 오랜 세월 현의 주리(主吏)로서 일해왔습니다. 빈틈없고 차분할 뿐만 아니라 우리 패현의 일이라며 누구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니 현령의 일을 맡겨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소하가 펄쩍 뛰며 두 손을 저었다.

“대나무를 깎고 붓을 묶어 문서를 꾸미거나, 산(算)가지를 놓아 숫자를 셈하는 일이라면 저도 남만큼은 합니다. 그러나 무리를 이끌고 적과 싸우는 일이라면 현군(縣軍)의 졸개보다 못합니다. 이같이 어지러운 세상에 남의 우두머리로는 결코 맞지 않습니다.”

이에 유방은 다시 조참을 내세웠으나 놀라며 물러서기는 조참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한낱 옥리(獄吏)로서 도필(刀筆)로 일하는 것조차 소(蕭)주리에게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하물며 한 무리의 장수되는 일이겠습니까? 더욱이 저는 미관말직이나마 진의 관리 노릇을 했던 자로써, 이 같은 일에 앞장섰다가 뒷날 잘못되기라도 하면 멸족의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실로 두려운 일이니 유형께서 맡아주시오.”

그렇게 사양했다. 조참이 나중에 덧붙인 핑계는 패공의 자리를 유방에게 양보하기 위해 억지로 꾸며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기(史記)>는 소하와 조참이 사양한 까닭을 오직 그것으로만 밝히고 있다.

어쨌든 물망에 오른 사람들이 한결같이 사양하자 패현 부로들은 다시 유방에게 매달렸다.

“일찍부터 우리는 귀공(貴公)께 여러 가지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일이 많았음을 들어왔습니다. 틀림없이 높고 귀한 분이 되실 것이라 믿습니다. 또 시초(蓍草·점치는 풀)와 귀갑(龜甲·거북껍질)을 써서 점을 쳐보아도 귀공 만큼 길한 점괘가 나온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유방은 몇번이나 더 사양하다가, 아무도 우두머리가 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결국은 패공(沛公), 곧 패현(沛縣) 현령을 맡았다. 이후 한동안 유방의 이름처럼 쓰이게 되는 벼슬자리였다.

그때의 패현 현령이 해야할 일은 무엇보다도 군사적 지도자로서 군민(軍民)을 이끌어 그 땅과 사람을 지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패공이 된 유방은 먼저 패현 관아에서 한 장수로서 치러야할 의식부터 시작했다. 곧 소와 말을 잡아 전술에 뛰어난 황제(黃帝)와 여러 가지 병기를 새로 만들어낸 치우(蚩尤)를 제사지내고, 그 피를 북에 발라 무운(武運)을 빌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전날 백제(白帝)의 아들을 죽인 적제(赤帝)의 아들임을 내세워, 붉은 색을 자신의 색깔로 삼고 이끄는 모든 군사들의 깃발을 붉은 색으로만 쓰게 했다.

장수로서의 의식을 끝내자 널리 방을 붙여 군사들을 모았다. 패현 곳곳에서 유방을 우러르던 젊은이들이 모여 며칠 안돼 3천이 넘는 군세(軍勢)를 이루었다. 이웃 수양현(Q陽縣)에서 비단 장수를 하던 관영(灌영)이 젊은이 수십 명을 이끌고 오고, 오래 유방에게 맞서오던 풍읍(豊邑)의 건달패 두목인 옹치(雍齒)가 패거리와 함께 유방 아래 든 것도 그때였다.

유방은 그를 따르던 무리에게 각기 알맞은 벼슬을 주어 군민(軍民)의 허리를 삼았다. 먼저 소하를 현승(縣丞)으로 올려 현 안팎의 공무를 맡게 했다. 또 조참은 주발과 관영과 함께 중연(中涓)이 되어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이끌게 하였다. 조무상은 좌사마(左司馬)로 바깥에서 군무(軍務)를 돌보게 하고, 노관은 빈객(賓客)을 삼아 안에서 모든 논의를 함께 했다. 번쾌는 사인(舍人)으로 언제나 큰칼을 들고 뒤따르게 하였으며, 하후영(夏候영)은 칠대부(七大夫)의 작위를 가진 태복(太僕)으로 유방의 수레를 몰게 했다.

안팎의 진용이 모두 짜여지자 소하가 나서서 여럿에게 말했다.

“무릇 일에는 순서가 있고 사람의 모임에는 상하가 있는 법이외다. 유공은 지금까지는 우리의 벗으로 허물없이 지냈고, 형제처럼 딩굴었으나 이제는 우리의 수령이 되었오. 앞으로는 반드시 패공으로 불러 사사로운 정으로 대하는 일이 없어야할 것이오. 또 지금까지는 계(季)란 자(字)를 이름은 대신 써왔으나 이제부터는 방(邦)을 휘자(諱字)로 삼는 게 어떻겠소? 이미 여러 사람이 그렇게 불러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뜻이 또한 작지 않으니 한 무리를 이끄는 수령의 이름으로 모자람이 없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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