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2월 13일 19시 17분


권력의 그늘(4)

낭중령께서 저를 찾으셨습니까?”

방안에 들어와 가볍게 두 손을 모으며 그렇게 묻는 장함의 태도에는 조고를 환관이라 깔보는 듯한데도 없었지만 권신(權臣)이라고 굽신대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조고가 여전히 윗자리에 앉은 채 아랫자리를 내주게 하며 깐깐하게 말했다.

“그렇소. 내 소부께 물어볼 일이 있어 보자 하였소.”

“무슨 일이신지….”

장함이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조고가 권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조고가 꼿꼿한 자세를 조금 허물며 물었다.

“소부께서는 지금 함곡관 밖의 도적들에 대해 어떻게 알고 계시오?”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 한 갈래가 희수(戱水)까지 이르렀는데 무리가 십만에 이른다고 하더군요.”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호모엑세쿠탄스! 인터넷으로 연재하는 이문열 문학의 결정판! 지금 읽어보세요.

말은 짧아도 조고로서는 장함이 한 말에 은근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아우에게 수만 전(錢)을 주고 사람을 풀어 알아낸 것을 궁궐 안에서 지내다시피 하는 장함도 훤히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비록 소부께서는 폐하를 위해 돈과 곡식을 셈하고 계시지만 실은 이 나라의 기둥이나 대들보감이라 들었소. 그런데 이제 보니 헛소문이 아닌 듯하구려. 황실의 살림꾼에 지나지 않으면서 어찌 그렇게 함양 밖의 소식까지 훤하시오?”

“산하(山海)와 지택(池澤)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들에게서 귀동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라의 기둥이나 대들보감이라니요? 지나친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소. 선제께서 일찍 천하를 하나로 아울러 태평케 하시지 않았다면, 소부께서는 진작부터 장수가 되어 천군만마를 이끌고 전장을 내달아야 할 사람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소.”

“그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글을 읽는 중에 몇 권 병서(兵書)를 읽고, 몸을 기르고 닦는 사이에 창검을 다루는 일과 활쏘기를 약간 익혔을 뿐입니다.”

겸손하면서도 자부(自負)가 전혀 없지는 않구나-조고는 속으로 그렇게 헤아리면서 마지막으로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내 이제 폐하께 소부(少府)를 장군으로 추천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무리 궁궐의 문호(門戶)와 백관의 출입을 도맡아 다스리는 낭중령이요, 이세황제의 유별난 믿음과 총애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조고는 환관이었다. 구경(九卿)의 하나를 제 방으로 불러 하는 말치고는 지나친 데가 있었다. 하지만 장함은 조금도 고까워하는 표정이 없었다.

“이 몸이 비록 재주 없으나 폐하께서 써주신다면 몸과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정중하게 말해놓고 다시 은근한 말투로 조고에게 사사로운 고마움까지 나타냈다.

“아울러 못난 이 몸을 위해 힘써주신 낭중령의 은혜도 마음에 새겨 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으며[능소능대], 굽힐 줄도 젖힐 줄도 아는 위인이로구나-조고는 그런 장함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재빨리 셈을 했다. 위험하지만, 턱없이 곧기만 하거나 앞 뒤 없이 부딪치고 보는 것들보다는 낫다. 감시만 게을리 하지 않으면 오래도록 밑에 잡아둘 수가 있고, 맞서려 들 때도 이익으로 달래볼 수가 있다….

“좋소. 그럼 폐하께 말씀 올릴 터이니 소부께서도 도적을 깨뜨릴 방략(方略)을 준비해 두시오. 그리고 나중에 폐하께서 백관을 불러 놓고 물으시거든 소부께서 일어나 그 방략을 아뢰도록 하시오.”

이윽고 조고는 장함에게 그렇게 이른 뒤에 황제를 찾아갔다. 그때 이세황제 호해는 궁궐 뒤뜰에서 미녀들 속에 파묻혀 질탕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옛 스승이자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조고만은 어려워할 줄 알았다.

“낭중령께서는 무슨 일로 짐을 찾아 오셨소?”

호해가 좌우를 물리치고 조고에게 물었다. 조고가 가장 충성스러운 체 말했다.

“폐하. 재주없이 나라의 봉록만 축내는 무리들이 아무래도 동쪽의 일을 크게 그르친 것 같사옵니다. 진나라를 거역한 수졸(戍卒)의 무리가 함곡관을 넘어 희수(戱水)가에 이르렀다고 하옵니다. 속히 문무백관을 모으시어 그 도적들을 깨칠 논의를 하게 하옵소서.”

굳이 백성들의 봉기를 아는 체 하고 싶지 않아 하던 호해도 조고가 정색을 하고 그렇게 말하자 정신이 확 들었다. 미룰 것도 없이 조고에게 그 날로 백관(百官)을 모두 불러모으게 했다. 백관들이 대전에 늘어서자 호해가 그들에게 물었다.

“도적떼가 마침내 도성 가까이 밀려들었다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나 백관들은 조고의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나서서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황제의 신임을 받아 법을 집행하는 조고가 그 동안 수많은 대신들에게 죄를 씌워 가혹하게 죽여온 터라 모두가 그의 눈에 띌까 두려워했다. 그때 장함이 일어나 말했다.

적들이 이미 이곳까지 이르렀을 뿐더러 그 머릿수가 많고 세력이 강대하다 하니, 이웃 군현에서 군사를 끌어오기는 때가 늦었습니다. 지금 여산과 아방에는 죄수들이 많이 끌려와 있는데 이들을 군사로 써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청컨대 그들의 죄를 사면해주고 무기를 내리시어 도적들을 쫓아내도록 하시옵소서.”

함양에는 그동안 화초처럼 길러온 5만 군사 뿐이라 달리 길이 없었다. 이에 이세황제는 다음날로 천하에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리고 아방궁을 짓던 죄수와 노비의 자식들 중에서 젊고 날랜 장정 20만을 뽑아 장함에게 주었다.

“경에게 대장군의 부월(斧鉞)을 내리니, 아무쪼록 도적을 무찔러 사직의 근심을 없이하고 놀란 백성들을 진정케 하라!”

장함은 그 날로 그들에게 병기와 복색을 내주게 해 군졸로 삼고, 함양에 남아있는 조련된 군사 약간을 긁어모아 그 군대의 허리로 삼았다. 그리고 밤이 되기 바쁘게 그들을 이끌고 서둘러 희수를 향했다.

“조련되지 않은 군사를 급하게 싸움터로 내모는 것은 백성을 함부로 죽이는 짓이라 했소. 장군께서는 너무 싸움을 서두르고 계신 게 아니오?”

걱정이 된 대신(大臣) 하나가 떠나는 장함을 잡고 그렇게 말했다. 장함이 자신에 찬 얼굴로 받았다.

“비록 내 군사들이 잘 조련되지는 않았으나, 죄수로 끌려와 오래 함께 먹고 자며 일해온 자들이라 나름의 규율과 상하는 있습니다. 오다가다 따라붙은 농투성이만이야 못하겠습니까?

또 이들은 지금 죄를 사면 받고 진나라 군사가 되어 한창 기세가 올라 있습니다. 그동안 싸움다운 싸움 한번 못해보고 여기까지 와 기강이 해이해진 갈가마귀떼와는 다를 것입니다. 게다가 머릿수도 우리가 훨씬 많으니 무얼 더 걱정하겠습니까?“

그런 장함의 헤아림은 옳았다. 그때 주문(周文)의 무리는 기강이 풀어질 대로 풀어져 있었다. 희수 가에 이른지 여러 날이 되도록 맞서오는 진나라 군사가 없자, 경계심은 무디어지고 허풍만 늘어갔다..

“저것들이 겁을 먹었다. 우리가 함양으로 치고 드는 수밖에 없겠구나.”

주문은 그런 말로 군사들의 기세를 올렸으나, 속으로는 난감하였다. 말이 그렇지 아무리 망해간다 해도 황제가 있는 진나라의 도성을 들이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함부로 밀고 들지도 못하고 물러설 수도 없어 엉거주춤 머물다 보니, 군사들의 기강이 말이 아니었다. 느느니 노름과 술이요, 취했다하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인근의 민가를 돌며 약탈과 행패를 일삼았다.

렇다고 장수인 주문까지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문을 드나드는 백성들 사이에 간세(奸細)를 끼워 넣어 오히려 전보다 더 세밀하게 함양 성안의 움직임을 살피게 했다. 그들이 맡은 일에 게으르지 않아 그 날 성안에 대사면령이 내리고 좌수들 중에서 군사를 뽑는다는 소식은 진작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급작스레 얽은 군대가 바로 그 날 밤에 자기들을 급습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삼경 무렵 하무(枚·군사들이 소리를 내지 못하게 무는 나무)를 물린 장함의 20만 대군이 갑자기 주문의 군사를 들이치자 조용하던 희수 가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장함의 군사들이 지른 불로 대낮같이 훤한 강변에서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도살이 벌어졌다. 기강이 풀어져 보초도 제대로 세워놓지 않고 술이 취해 자고 있던 ‘장초(張楚)’의 장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희수는 불길과 진병(秦兵)의 창칼을 피해 뛰어든 그들의 시체로 메워지고, 강변 모래밭은 그들의 피로 흥건히 젖었다.

홀로 깨어있던 주문이 발을 구르며 장졸들을 몰아댔으나 이미 기운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어둠을 틈타 겨우 몸을 빼내 함곡관으로 달아났다. 날이 밝은 뒤 함곡관을 빠져 나와 남은 군사를 수습해보니 한때 십만을 웃돌던 머릿수가 3만을 채우지 못했다.

“조양(曹陽)으로 가자. 거기서 다시 한번 세력을 키워보자.”

주문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들이 함곡관으로 들기 전 마지막으로 기세를 올렸던 땅으로 군사를 물렸다.

주문의 군사들이 쫓겨가자 다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함곡관 안은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조고에게 보내는 이세황제 호해의 믿음과 총애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조고는 주문과 그 군사들이 자극한 위기의식 때문에 호해가 권력의 도취에서 깨어나는 게 두려웠다. 거기다가 대신들이 쉽게 황제를 볼 수 있음으로써 자기가 저지른 못된 짓을 일러바치는 것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머리를 굴린 끝에 꾀를 내어 호해에게 권했다.

“선제께서는 일찍 등극하시어 천하를 다스리신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감히 그릇된 짓을 하거나 모질고 사된 말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폐하는 젊으신 데다 이제 막 즉위하셨으면서 어찌하여 나랏일을 모두 대신들과 의논해 결정하려 하십니까? 일이 잘못되면 여러 대신들에게 폐하의 어둡고 모자란 곳만 보여주게 됩니다. 천자가 스스로 짐(朕)이라 하는 것은, 본래 천자란 그저 한 크고 거룩한 조짐(兆朕)같은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자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쉽게 볼 수 있고, 그 소리를 아무나 들을 수 있게 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

조고가 가장 충성스러운 체 그렇게 말하니, 모처럼 깨어나려던 호해의 정치적 감각은 다시 조고가 교묘하게 비틀어놓은 권력의 단맛으로 무디어졌다. 그때부터는 깊은 금중(禁中)에 거쳐하면서 오직 조고하고만 나랏일을 의논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