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3월 6일 19시 08분


진승이 변했다는 소문은 그가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돌기 시작했다. 대개는 미천했던 시절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높고 귀해진 그에게 기대려 왔다가 푸대접을 받은 데서 생겨난 말이었다. 아마도 그 첫 번째가 그의 장인[처지부]이 될 듯싶다.

진승이 장가를 든 것은 남의 머슴살이를 하고 있을 때여서 처가도 변변치 못했다. 장인 되는 사람은 가난한 농부로서 진승에게 딸을 준 뒤에도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사위가 임금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가을걷이조차 미루고 한달음에 진현(陳縣)으로 달려갔다.

그때 진승은 한창 임금노릇에 맛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궁궐을 으리으리하게 꾸미고 백관을 두어 임금으로서 지녀야 할 위엄을 키우고 있는데 장인이 찾아왔다. 새로 얻은 미인들에 마음을 뺏겨있는 그에게 어려운 시절에 만났던 아내가 대단할 리 없었고 아내가 그러하니 찾아온 장인 또한 반가울 리 없었다. 마지못해 만나주기는 했으나 길게 읍(揖)할 뿐 절은 하지 않았다.

진승의 장인은 비록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도 사람까지 못나지는 않았던 듯싶다. 사위가 하는 짓을 보고 벌컥 성을 내며 소리쳤다.

“세상이 어지러운 틈을 타 함부로 왕을 일컫고[호亂僭號], 어른에게는 오만 방자하니 네가 그리 오래가지 못하겠구나!”

그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제야 놀란 진승이 무릎을 꿇고 빌었으나 장인은 끝내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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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승이 자신을 찾아온 옛 친구를 죽인 일도 좋지 않은 소문이 되어 떠돌았다. 처음 진승이 반겨 맞아 궁궐에 머물게 된 그 옛친구는 지난날의 정분만 믿고 왕을 대하는 예를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렵게 지내던 시절의 얘기를 함부로 하고 다녔다. 보다 못한 신하가 그 일을 일러바치자 진승은 마침내 옛 친구의 목을 베게 하여 그 입을 막았다.

진승은 왕이 된 자신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핑계 댔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때 이미 권력의 단맛에 취해 제정신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 그 뒤 그를 왕위로 끌어올린 옛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새 사람들도 밝고 어질다 하면 아무도 그 곁에서 일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진왕의 주변에는 권력을 탐내고 이익을 노리는 소인배만 모여들었다. 진왕은 그들 중에서 주방(朱房)이란 자를 총애하여 중정관(中正官)을 삼고 호무(胡武)를 믿어 사과관(司過官)로 삼았다. 그리고 벼슬아치를 뽑아 쓰는 일과 그 잘못을 캐고 벌주는 일을 그들 두 사람에게 모두 맡겼다.

그렇게 되자 장초(張楚)의 조정은 주방과 호무가 주무르게 되었다. 진왕 밑에서 벼슬을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두 사람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고 그래서 벼슬을 얻어도 그들 눈에 벗어나면 성하게 살아남지 못했다. 장수들이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와서도 그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오히려 죄를 물었으며 진왕에 앞서 그들의 명을 받들지 않으면 바로 반역으로 몰렸다.

주방과 호무는 또 죄를 다스림에 가혹한 것을 진왕에 대한 충성으로 여겼다. 하찮은 일도 끔찍한 벌을 주어 보는 이를 떨게 했고 또 진왕에게는 큰 공을 세운 양 자기들이 다스린 죄를 턱없이 부풀려 말하였다. 그러자 대신과 장수들은 그들과 마주치기 싫어 진왕 가까이 가기조차 꺼렸다.

각처로 파견한 장수들이 너무 빨리 자립하여 왕이 된 것과 그런 그들을 통제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는 것도 진왕이 그토록 일찍 장함에게 되몰리게 된 원인이었다. 장수들이 떠날 때마다 많건 적건 군사를 나누어 주다보니 종주국(宗主國)격인 장초(張楚)는 군사적으로 차츰 공동화(空洞化) 되어갔다. 그래서 진왕에게는 자립하여 왕이 된 그들의 충성을 강제할 힘이 남아있지 않을뿐더러 든든한 동맹을 담보할 수단조차 없었다.

장초(張楚) 조정의 그 같은 취약점은 조나라가 자립할 때 이미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장군 무신(武臣)이 자립하여 조왕(趙王)이 되었다는 말을 듣자 진왕은 몹시 성을 냈다. 진현에 있는 무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그 밑에서 좌우(左右) 승상이 된 장이(張耳)와 소소(邵騷), 그리고 대장군이 된 진여(陳餘)의 가족까지 모조리 잡아들이게 했다. 가까운 날 저잣거리로 끌어내어 목을 벰으로써 다른 장수들에게 본보기로 삼을 작정이었다.

그때 상주국(上柱國·초나라 武官 최고직)이던 방군(房君) 채사(蔡賜)가 나서서 말렸다.

“천하의 공적(公敵)인 진나라를 아직 쳐 없애지 못하였는데 조왕과 그 장상(將相)의 가족을 죽인다면 이는 또 다른 진나라를 적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조나라는 땅이 넓고 백성들이 많은 데다 방금 새로 일어나 그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를 적으로 삼느니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경하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빨리 서쪽으로 군사를 보내 진나라를 치게 하도록 만드시는 게 낫겠습니다.”

그때 진왕은 사람이 좀 변하기는 해도 아직 온전히 돌지는 않은 채였다. 곰곰이 헤아려 보니 채사의 말이 옳았다. 곧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을 궁중으로 옮겨 살게 하고 장이의 아들 오(敖)를 성도군(成都君)에 봉했다. 그런 다음 사신을 조나라에 보내 무신의 등극을 경하함과 아울러 하루빨리 군사를 서쪽으로 내어 함곡관으로 쳐들어갈 것을 당부하였다.

얼른 보아서는 꽤나 그럴듯한 계책이었으나 그 뒤가 진왕이 바란 대로 되지 않았다. 사신을 통해 진왕의 경하와 당부를 들은 장이와 진여가 가만히 조왕을 만나보고 말했다.

“대왕께서 조왕이 되시는 걸 경하해준 것은 초(楚·여기서는 張楚)나라의 뜻이 아니라 저들의 계책에 따라 대왕을 달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초나라가 진나라를 쳐 없앤 뒤에는 반드시 조나라에 칼끝을 들이댈 것이니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군대를 서쪽으로 움직이지 마시옵소서. 북쪽으로 연(燕)과 대(代)를 쳐서 얻으시고 남쪽으로 하내(河內)를 거두시어 먼저 영토부터 넓혀 두셔야 합니다. 조나라가 남쪽으로는 대하(大河)에 의지하고 북쪽으로는 연과 대를 차지하고 있으면 초나라가 비록 진나라를 이긴다 하더라도 조나라를 함부로 억누르려 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조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군사를 서쪽으로 내는 대신 장수들을 보내 연과 대 땅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곧 한광(韓廣)은 옛 연나라 땅을 거두게 하고 이량(李良)은 상산(常山)을 치도록 했으며 장염(張(암,염))은 상당(上黨)을 우려 뽑게 하였다.

그런데 한광이 다시 연왕(燕王)으로 자립하여 진왕과 조왕 사이에 있었던 일을 조왕과 다시 되풀이하게 된다. 진왕과 직접 관련은 없으나 당시 새로 일어난 제후국들의 성격을 보여주는 데가 있어 대충 훑어보면 이렇다.

한광이 대군을 이끌고 연나라에 이르자 그곳의 호족들이 모여 한광에게 권했다.

“초나라도 왕을 세웠고 조나라도 왕을 세웠습니다. 우리 연나라가 비록 작다하나 병거(兵車) 만승(萬乘)의 나라였으니 자립하기에 넉넉합니다. 부디 장군께서 연왕에 오르시어 이 땅과 백성들을 지켜주십시오.”

“여러분의 뜻은 고마우나 늙으신 어머니와 처자가 조나라에 있어 따를 수가 없소이다.”

한광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렇게 받았다. 그러자 연나라 호족 가운데 하나가 자신 있게 말하였다.

“조나라는 이제 서쪽으로는 진나라를 걱정해야 하고 남쪽으로는 초나라를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 그들이 무슨 힘이 남아 우리를 칠 수 있단 말입니까? 거기다가 초나라는 그렇게 강대한데도 오히려 조왕(趙王)과 그 장상(將相)의 가족들을 해치지 못하였는데 방금 생긴 조나라가 어찌 함부로 장군의 가족을 해칠 수 있단 말입니까?”

한광이 가만히 들어보니 그 말이 옳았다. 마침내 자립하여 연왕이 되었다. 그 뒤는 연나라 사람들이 헤아린 대로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조나라는 연나라 왕의 어머니와 가족을 연나라로 보내주었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조왕은 어쩔 수 없이 한광의 자립을 허용하고 나서도 마음 속의 괘씸함을 다 털어 내지 못했다. 거기서 또다시 당시 새로 일어난 제후들과 그 장상(將相)들 사이의 이반(離反)과 결속의 양태를 잘 보여주는 일이 터졌다.

조왕은 나라의 틀이 잡히는 대로 장이 진여와 더불어 북쪽으로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쳤다. 그런데 어느 날 홀로 진채 밖을 거닐다가 마침 정탐하러 나온 연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연나라 장군은 조왕을 가두어 두고 조나라의 땅을 절반 떼어주면 조왕을 놓아주겠다고 통보해왔다. 뜻밖의 낭패를 당한 장이와 진여가 다른 조건을 내걸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자를 보내기만 하면 목을 베어 돌려보내며 땅을 내놓지 않으면 왕도 죽여버리겠다고 을러댔다.

그때 조나라 진채에 나무하고 말 기르는 군졸[시養卒』이 하나 있었는데 함께 일하는 군졸들을 보고 결연히 말했다.

“내가 연나라 장수를 달래 조왕을 수레에 싣고 돌아오겠다!”

그러자 군졸들이 비웃으며 말했다.

“벌써 사신으로 간 사람만 여남은 명이 되지만 가는 족족 모조리 죽음을 당하였다. 그런데 네깟 것이 어떻게 왕을 구해올 수가 있단 말이냐?”

하지만 그 군졸은 아무 대꾸 없이 연나라 성벽 아래로 달려가 성을 지키는 연나라 장수에게 만나기를 청했다. 연나라 장수가 마지못해 성벽 위로 나오자 그 군졸이 올려보며 크게 소리쳐 물었다.

“장군께서는 제가 무엇 때문에 뵙기를 청했는지 아십니까?”

“아마도 너희 왕을 구하고 싶어하는 것일 테지”

연나라 장수가 시답잖다는 듯 그렇게 대꾸했다. 그 군졸이 다시 물었다.

“장군께서는 우리 우승상 장이와 대장군 진여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십니까?”

“슬기롭고 밝은 사람들이지.”

“그럼 그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아십니까?”

“자기들의 왕을 구하려 하겠지”

연나라 장수가 듣지 않아도 뻔하다는 투로 그렇게 받았다. 그러자 그 군졸이 껄껄 웃으며 깨우쳐 주듯이 말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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