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6월 12일 17시 37분


그들의 만남(4)

항량이 이끄는 세력의 군사(軍師)가 된 범증이 패공 유방을 보고 난 뒤 보름쯤 지났을 때였다. 싸움을 나갔던 한 갈래의 군사가 항량의 본진(本陣)으로 돌아왔다. 양성(襄城)을 떨어뜨리고 돌아온 군사들로서, 우두머리 장수는 바로 그 동안 여럿으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그 이름을 들은 항우였다. 항량은 범증을 자신의 군막에 불러놓고 항우를 맞아들였다.

“어려운 싸움이라고 들었다. 애썼다. 어디 상한 데는 없느냐?”

항우가 군례(軍禮)를 올리자 항량이 숙부라기보다는 자애로운 아비처럼 항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아무 탈 없습니다만 군사들이 좀 상했습니다. 특히 강동 자제들을 수 백 명 잃었고, 장수로는 용저(龍且)와 여마동(呂馬童)이 다쳤습니다.”

“여러 날 끄는 걸로 미루어 어려운 싸움인 줄은 알았지만 그토록 심할 줄은 몰랐구나. 양성(襄城)은 어떻게 처리하였느냐?”

항량이 그렇게 묻자 항우는 잠시 주저함도 없이 받았다.

“성이 떨어지는 날로 군민(軍民)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맞선 것들은 모두 산 채 땅에 묻어버리고 왔습니다.”

“산 채로 땅에 묻었다고? 그게 얼마나 되느냐?”

항량이 약간 어두워진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항우는 태연하기만 했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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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령과 현리, 군관들에다 그들의 부추김에 놀아난 현군과 성안 젊은것들을 합쳐 3천 명 남짓이었습니다”

“진나라 관리들은 그렇다 쳐도 군사들과 백성들은 살려서 쓸 수도 있지 않았느냐? 거기다가 어차피 우리 손안에 들어온 성이면 우리 땅으로 지켜야할 터, 그때에는 더 많은 군사들이 있어야할 터인데......”

“양성 같은 곳을 지키려고 군사를 남긴다는 것은 우리 힘을 흩는 일일뿐입니다. 우리가 진나라를 쳐 없애고 함양을 차지하면 양성은 절로 우리 손에 들어올 것이오, 진나라에 져서 쫓기게 된다면 설령 양성을 보존하고 있다해도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거기다가 양성의 군민은 이미 진나라의 다스림에 길들어 있어 쉽게 우리에게 항복하고 따라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언제 창칼을 거꾸로 들이댈지 모른 것들이라 차라리 땅에 묻어버린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항량의 얼굴은 어두웠고 범증의 마음 또한 적지 아니 무거웠다.

“사람을 산 채로 땅에 묻는 짓은 여정(呂政)같이 자들이나 하는 폭거(暴擧)이다. 민심이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

그렇게 나무라듯 조카의 말을 받는 항량 곁에서 범증은 가만히 항우가 하는 양을 살폈다. 항우가 한바탕 크게 웃은 뒤에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여정이 시황제(始皇帝)가 될 수 있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예로부터 이르기를 남의 임금 된 자에게는 부끄러워할 일이 없으며[군왕무치], 군사를 부림에는 속임수를 마다하지 않고,[兵不厭詐] 영웅은 간사함과 흉악함과 계략과 독기[奸凶計毒]을 다 품어야 한다 했습니다. 모두 비상한 일을 하려는 이에게는 비상한 방도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 세상 모든 일에 먹물들의 탁상공론만을 법으로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진나라를 쳐 없애고 천하를 구할 수 있다면 저는 3천 명이 아니라 30만 명이라도 땅에 묻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내 일찍이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도 민심을 얻어 큰 뜻을 이룬 이는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받는 항량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나 곁에 있는 범증은 달랐다. 그 나이에 이르도록 범증이 배우고 익힌 것이 많았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여 익힌 것은 병가(兵家)요, 높이 받들어온 것은 형명학(刑名學)이었다. 그같은 항우의 말을 듣자 항량의 장막에 들고 처음으로 후련함과 함께 오히려 한줄기 휘황한 가능성의 불꽃을 본 느낌이 들었다.

(엄청난 힘과 기상이다. 인의(仁義)니 왕도(王道)니 하는 것들이나 무위(無爲)니 자연(自然)이니 하는 것들과는 다르지만, 저 또한 천하를 다스릴 방도가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시황제처럼 항구적인 통치 원리로 키우지만 않는다면, 이같은 난세를 헤쳐가는데는 오히려 간명하고도 효능이 더 클 수도 있다. 저만하면 내 여생을 한번 걸어 볼만한 사람이다.)

범증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스스로 나서 항우를 발명해 주었다.

“목숨도 목숨 나름 - 적은 목숨을 들여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가볍게 여겨 흠될 것 없습니다. 옛적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은 걸(桀)을 칠 때 맞서는 자들을 모두 죽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가솔들까지 잡아다 죽이거나 노비로 삼았고, 주나라를 일으킨 무왕(武王)은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방패와 쇠몽둥이가 피에 떠다닐 만큼 많은 주(紂)의 군사를 죽이고 나서야 천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왕은 또 뒷날에 경계를 내리기 위해 죽은 주(紂)의 시신에 화살 세 발을 쏘고 그 목을 경여(輕呂=보검 이름)로 잘랐으며, 목을 매어 죽은 그 애회(愛姬)들까지도 검은 도끼로 목을 베어 작은 백기에 매달게 했습니다. 탕무(湯武)의 밝고 어지심으로도 그리하셨으니, 이번 일도 반드시 젊은 장군만을 나무라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

범증의 그같은 말에 비로소 항량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먼저 두 손을 모아 범증에게 고마움부터 드러내고 말하였다.

“못난 조카를 좋게 보아주시니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 아이는 가형(家兄)의 한 점 혈육일 뿐만 아니라 우리 하상(下相) 항가(項家)를 짊어지고 갈 종손이기도 합니다. 자식 못지 않게 공들여 길렀으나 모자란 곳이 많으니 부디 선생께서 채우고 다듬어 주십시오”

그리고는 다시 항우을 보며 엄숙하게 말하였다.

“우(羽)야. 여기 범증 선생께 인사 올려라. 우리 삼군(三軍)의 스승으로 모신 분이시다. 너는 범증 선생을 스승으로 모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아버님처럼 받들도록 해야한다. ”

무엇에 끌렸는지 항우도 한번 망설이는 법조차 없이 범증에게 넙죽 절을 올리면서 시원스레 말하였다.

“항우가 군사(軍師)를 절하며 뵙습니다. 이제부터 아부(亞父)라 부르겠습니다.”

아부란 아버지에 버금가는 이를 말하니 곧 아버지 다음으로 우러러 모시겠다는 뜻이 된다. 평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항우의 기개에 견주어 보면 엄청난 겸양이요, 공손이었다. 그같은 항우의 태도가 인간적인 매력이 되어 다시 범증을 사로잡았다. 거기다가 며칠 안돼 회왕(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찾았다는 전갈이 들어오면서 그때까지 범증의 마음 한구석을 어둡게 하고있던 후회를 한층 줄였다.

“그래 왕손(王孫 =당시 왕손이란 호칭은 귀공자를 뜻하였으나 여기서는 뜻 그대로 왕의 자손)은 어디서 찾았다고 하던가?”

항량은 웅심을 찾았다는 말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 일을 전하러온 종리매(鍾離매)에게 물었다. 종리매가 들은 대로 답했다.

“음릉(陰陵) 남쪽의 한 산간 마을에서였다고 합니다. 황공스럽게도 왕손께서는 양치기로 민간(民間)에 숨어살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찾았는가”

“널리 사람을 풀어 초나라의 옛 땅 구석구석을 수소문하게 하였던 바, 음릉 땅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늙은 부부와 젊은 아들이 산다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일흔도 넘어 뵈는 할미와 예순도 안돼 보이는 영감이 스무 살도 안 되는 아들과 함께 양을 기르며 사는데 셋의 나이가 엇바뀌어 부부로도 이상하고 모자(母子)로도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몰래 살펴보게 하였더니 더욱 이상한 게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그 젊은이는 양치기를 하며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의 눈이 없는 곳에서는 오히려 그 늙은 남녀가 젊은이를 모시는 형국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그들을 잡고 다그쳤더니 놀랍게도 그 젊은이는 애왕(哀王)의 원자(元子) 되시는 심(心)이라 했습니다. 곧 우리 초나라 사람들이라면 한결같이 그 죽음을 분하고 애통히 여기는 회왕의 적통(嫡統)이 되는 셈입니다. 또 할미는 그 젖어미이던 궁녀였으며 영감은 궁궐의 젊은 시위(侍衛)였는데. 애왕의 배다른 형인 부추(負芻)가 애왕을 죽이고 초나라 왕위를 찬탈할 때, 젖먹이인 애왕의 한점 혈육을 빼내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뒷날을 기약하며 숨었으나,......”

그 뒤 초나라의 참담한 망국사(亡國史)는 항량도 잘 알고 있었다.

애왕이라면 진나라의 속임수에 걸려 함양으로 끌려간 뒤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원통하게 죽어간 회왕의 손자인 효열왕(孝烈王)의 둘째 아들이 된다. 효열왕이 죽자 그 맏이인 유왕(幽王) 한(悍)이 왕위를 이었으나 유왕이 즉위한지 10년만에 후사 없이 죽자 동생인 유(猶)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애왕이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두 달도 안돼 배다른 형 부추의 무리가 애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 초나라는 그 뒤 다섯 해를 버티지 못하고 진나라 장수 왕전(王剪)과 몽무(蒙武)의 대군에게 망해 진나라의 삼군(三郡=南郡 九江 會稽)이 되고 부추는 사로잡혀 함양으로 끌려가고 만다.

“하지만 회왕은 이미 70년 전에 돌아가신 분, 애왕의 참사도 벌서 스무 해가 다 되어 가는 옛날 일이다. 무엇으로 그 젊은이가 회왕의 적손(嫡孫)이라 믿을 수 있었다던가?”

“애초 상주국께서 회왕의 후사를 찾으라 명하셨을 때 저희는 먼저 옛 초나라 조정에서 일한 내시 몇을 찾아 두었습니다. 먼저 늙은 그들을 데려가 그 궁녀와 시위를 보였던 바, 모두 알아보았으며, 젊은이에게는 따로 초나라 왕실의 보물임에 분명한 몇 가지 신표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 초나라 신하들 중에도 그들을 알고 몰래 연결을 꾀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게 중에는 애왕 때 영윤(令尹=초나라의 상경. 재상급)을 지낸 송의(宋義)란 이가 있는데, 머지않아 숨어사는 유신(遺臣)들을 모아 이리로 오겠다고 전갈을 보내 왔습니다.”

그렇다면 더 의심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항량이 기쁜 듯 두 손을 비비며 범증을 돌아보고 말했다.

“참으로 잘되었습니다. 선생께서 가르치신 대로 초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종리매에게 말했다.

“급히 파발을 놓아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별장(別將)들을 모두 설현(薛縣)으로 불러모으게 하라. 그들과 의논해 하루 빨리 임금을 세워 초나라 왕실을 되살린 뒤에 서쪽으로 대군을 휘몰아 진나라를 쳐 없애야겠다.”

그런 항량의 시원스런 결정에는 터럭 만한 사심도 없어 보였다. 거기서 범증은 귀갑(龜甲)과 시초(蓍草)에서 읽은 불길한 점괘를 머리 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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