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량이 회왕(懷王)의 적손(嫡孫)인 웅심(熊心)을 초나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직접 거느리고 있는 장수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력 아래 든 모든 별장(別將)들까지 설현(薛縣)으로 불러모으자, 패공 유방도 장량과 노관 번쾌 하후영 등을 데리고 설현으로 갔다. 옹치를 내쫓고 풍읍을 되찾느라 항량에게서 오대부(五大夫) 작위를 가진 장수 열 명과 군사 5천 명을 얻어 쓴 뒤로 패공은 항량의 별장처럼 되어 있었다.
패공 유방이 항량의 군막에 이르자 이미 많은 장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항량이 언제나 그랬듯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유방을 맞았다.
“패공, 참으로 잘 오셨소. 내 오늘 긴히 논의할 일이 있어 공을 불렀으나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하실 일이 있소.”
그래놓고는 다시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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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한 깃발 아래 싸우면서도 서로 모르는 장군들이 많으니 될 법이나 한 일이겠소?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인사를 나누는 게 옳을 것이오. 여기 이 패공은 진나라가 보낸 현령을 죽인 패현(沛縣)과 풍읍(豊邑) 사람들이 새 현령으로 떠받든 호걸로서, 성은 유(劉)요 이름은 방(邦)이며 자(字)는 계(季)라 하오. 지금은 패현과 풍읍 뿐만 아니라 탕현(탕縣) 하읍(下邑)까지 휩쓸어 사수군(泗水郡)을 진나라의 폭정으로부터 구해낸 분이외다.”
그러자 거기 모였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일어나 두 손을 모으며 패공에게 인사를 청했다. 항량은 패공을 이끌고 그들 사이를 돌며 경포(경布)와 진영(陳영) 여신(呂臣) 포장군(蒲將軍) 같은 별장에서부터 계포 종리매 환초 용저 정공(丁公)등 휘하 장수들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소개하며 서로 인사를 나누게 했다.
그런데 그들 사이를 다 돈 패공이 저만치 상석에 앉아 있는 법증을 알아보고 예를 올리려 할 때였다. 범증 곁에 서 있는 낯선 젊은 장수를 본 패공은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천 근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열 자 키에 우람한 몸피나 그걸 둘러싼 전포(戰袍)와 갑주(甲胄)의 삼엄함 뿐만이 아니었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듯한 두 눈과 불쑥 솟은 관자놀이, 그리고 잘 빗어 속발건(束髮巾)으로 묶어놓아도 사자의 갈기처럼 굽이치는 머리칼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힘과 기세는 멀리서도 사람을 압도하기에 넉넉했다. 마치 그 안에 태풍이나 벽력을 가둬놓은 사람을 보는 듯했다.
(저 사람이 누구인가. 어떻게 우리 중에 저런 사람이 났단 말인가. 천제(天帝)의 아들이나 교룡(蛟龍)의 씨란 바로 저런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그대 힘과 기개의 덩어리 같구나.....)
패공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질린 눈길로 항우를 보고 있는데, 항량이 그걸 알아보았는지 너털웃음과 함께 말했다.
“못난 조카 적(籍)인데, 자를 우(羽)로 쓰고 있소이다. 방금 양성(襄城)을 떨어뜨리고 돌아왔으나 아직은 부장(副將)의 반열이라 따로 공을 찾아보고 예를 올리게 하려던 참이었소. 하지만 이왕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으니 저 아이의 인사도 받아두시오.”
그리고는 무엇 때문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유방을 마주 바라보고 서 있는 항우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우야, 무얼 하느냐? 어서 패공께 예를 올려라. 장차 우리와 함께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를 쳐 없앨 분이시니 받들어 모심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때 유방이 먼저 항우를 향해 두 손을 모으며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작은 장군을 하관(下官)의 군례(軍禮)로 뵙습니다. 저는 패현 부형(父兄)들의 뜻을 받든답시고 주제넘게 현령 자리를 맡았다가 속읍(屬邑)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해 크게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뻔했던 유(劉)아무개입니다. 다행히 상주국(上柱國)께서 장졸을 빌려주시어 잃은 땅은 되찾았으나 그 부끄러움은 아직 다 씻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 말장(末將)으로 상주국을 따르게 되었으니, 작은 장군께서도 마땅히 저의 상장(上將)이십니다. 어리석고 힘없다 물리치지 마시고 저를 수하로 거두어 부려 주십시오. 개나 말의 수고로움[견마지로]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유방이 그렇게 나온 것은 본능적인 감각에 따른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선뜻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내가 먼저 굽히고 숙어들어야 한다. 저 엄청나고 터질 듯한 힘과 기세에 함부로 맞서서는 아니 된다 - 그런 판단이 그를 기꺼이 항우에게 굽히게 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항우였다. 거의 거만하게 느껴질 만큼 뻣뻣하게 서서 유방을 건너보던 항우가 갑자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유방의 예를 받으며 말했다.
“항적이 패공께 문후(問候) 올립니다. 진작부터 장군의 우레 같은 이름을 들어왔으나 양성 (襄城)을 우려 빼고 오느라 이제야 뵙습니다.”
뒷날 그와 목숨을 걸고 천하를 다투게될 일이 어떤 예감으로 닿아온 것일까. 그날 유방을 처음 보았을 때 항우 또한 유방에게서 묘한 힘을 느꼈다. 후리후리한 키에 우뚝 솟은 코와 튀어나온 이마, 길고 멋진 수염 같은 것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특이한 기품이나 유들유들하면서도 꼬이거나 맺힌데 없는 언행에서 느끼게 되는 알 수 없는 친화력이 그러했다.
항우가 잠시 경계로 굳어졌던 것은 자신이 가진 것과는 다르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유방의 그 묘한 힘에 갑작스런 호승심(好勝心)이 인 탓이었다. 하지만 유방이 한껏 머리를 숙이고 다가들자 그 호승심은 항우 일생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던 특이한 자부심에 가리워 눈 녹듯 스러졌다. 자신에게 맞서는 자에게는 무자비하기 짝이 없지만 엎드리고 따르는 자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그의 특성이 발동한 것이었다.
(너도 내게는 맞서지 못하는구나. 나를 알아보고 스스로 무릎을 꿇어오는구나. 그렇다면 나도 얼마든지 너그럽고 겸손할 수 있다.)
그런 마음으로 마주 머리를 숙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항우의 마음 한구석에는 미심쩍은 느낌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저 무르고 맺힌데 없어 보이는 것이 어쩌면 저 사내의 힘이 아닐까. 물처럼 부드러워 오히려 단단한 바위를 깎고, 활대처럼 많이 휘어질수록 더 멀리 화살을 날리는 그런 경우는 아닐까.
하지만 겉으로 내비친 항우의 겸양은 조카의 강한 성격을 늘 걱정해오던 항량을 매우 기쁘게 만든 듯했다. 흡족해하는 눈길로 조카를 바라보다가 너털웃음과 함께 유방에게 말했다.
“지나치게 스스로를 낮추는 것도 예가 아니라[過恭非禮] 들었소. 패공은 자중하시오. 적아(籍兒) 나이 이제 스물 다섯, 비록 어리지는 않다 하나 패공의 상장이라니 가당키나 하겠소? 오히려 패공께서 우리 적아를 많이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오.”
말뿐만이 아니었다. 항량에게도 사랑하는 조카와 유방이 앞날에 벌일 처절한 쟁패가 끊임없이 어떤 예감으로 닿아온 것일까, 그는 왠지 항우와 유방을 특별한 사슬로 묶어두려 했다. 그날 여러 장수들과 웅심(熊心)을 왕으로 세워 초나라를 다시 일으키기로 논의를 마친 뒤의 일이었다. 한바탕 잔치로 모여든 장수들을 위로한 뒤 따로 항우와 유방을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들인 항량이 먼저 항우를 보고 말했다.
“시절이 우리를 오중(吳中)에서 불러내 멀리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 갈 길은 더욱 멀고 험하다. 네 비록 재주가 빼어나고 용력(勇力)이 남다르나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 혼자서는 큰일을 이룰 수가 없다. 또 내가 곁에 있어 돕는다 해도 이미 몸이 늙어가거니와 사람의 앞일은 누가 알겠느냐. 어디까지 너를 따라다니며 돌볼 수 있을 지는 하늘만이 아실 것이다. 범증 선생이나 계포 종리매 환초 등 이미 우리 막하(幕下)에 든 이들과는 따로 너를 이끌고 보살펴줄 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여기 이 패공이 어떠냐? 두 사람이 형제가 되어 서로 손발처럼 도우며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 잡을 수 있다면 그 아니 아름다운 일이겠느냐?”
그런 다음 항우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유방에게 다시 말했다.
“공을 만난 지는 달포밖에 되지 않고 깊이 마음을 주고받을 겨를도 없었으나, 나는 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듯하오. 공에게는 봉황의 기품이 있고 용의 기상이 있소. 하지만 가시덤불에 깃들이고 얕은 개울에 누운 형국이니 비웃고 얕보는 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오. 어떻소? 저 아이와 형제가 되어 가시덤불과 개울을 벗어나 보지 않겠소? 저 아이의 재기와 용력에 공의 지혜와 덕을 합쳐 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애고 가여운 창생(蒼生)들을 구해보시지 않겠소?”
그러자 유방이 길게 헤아려볼 것도 없다는 듯 받았다.
“감히 청하지는 못했지만 실로 바라던 바입니다. 이제부터 이 유(劉)아무개, 작은 장군을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냥 두면 바로 엎드려 항우에게 큰절이라도 올릴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수그렸다. 항량이 놀라 크게 손을 내저으며 유방을 말렸다.
“패공 잠깐 멈추시오. 내 듣기로 나이 어린 아재비는 있어도 나이 어린 형은 없다 하였소. 그런데 여남은 살이나 어린 저 아이를 형님 삼겠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오?”
“주종(主從)과 군신(君臣) 사이의 높고 낮음을 어찌 나이로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내 이미 항씨가(項氏家)를 주군(主君)으로 삼았으니, 작은 장군과 형제의 의를 맺는다면 마땅히 작은 장군이 형이 되어야지요.”
그러자 그때까지 머뭇거리고 있던 항우가 다시 나섰다.
“패공께서 이 적(籍)을 아우로 받기 싫다면 어쩔 수 없거니와, 형제가 된다면 마땅히 패공께서 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 숙질(叔姪)이 당장의 세력으로 형제의 차서(次序)를 바꾸었다고 세상이 크게 비웃을 것이오.”
그 일도 유방이 자신의 힘 앞에 엎드린 것으로 풀이한 항우가 크게 인정을 베풀 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유방은 기어이 형 되기를 마다했다. 보다 못한 항량이 두 사람의 뜻을 절충했다.
“좋소이다. 좋아.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인가는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일은 두 사람이 형제가 되어 서로 돕는다는 것이오. 오늘 일은 두 사람이 형제 됨을 맹세하는 것만으로도 뜻이 깊소이다. 나도 듬직한 조카 하나 더 얻은 것으로 기쁨을 삼겠소.”
그렇게 하여 유방과 항우는 형과 아우를 정하지 않은 기이한 형제로 맺어졌다. 항우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유방에게는 고비마다 요긴하기 짝이 없게 활용된 형제의 의(義)였다. 나중 항우는 그 때문에 몇 번이고 유방의 숨통을 끊어놓을 놓을 기회를 놓치게 되는데, 지하에서 그걸 보고있어야 했던 항량의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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