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그러니까 진(秦) 이세(二世) 황제 2년 유월, 항량과 범증은 회왕(懷王)의 핏줄로 양치기 노릇을 하던 웅심(熊心)을 설현으로 맞아들여 왕위에 올리고 다시 회왕이라 일컬었다. 자손 되어 윗대의 왕호를 함부로 쓰는 것은 기휘(忌諱)에 걸리는 일이나, 회왕의 일이 초나라 사람들에게는 워낙 가슴에 맺힌 한(恨)같은 것이라 다시 그 왕호를 빌어 쓰기로 했다. 그들은 설현 현청(縣廳)을 임시 왕궁으로 삼아 새 회왕을 들인 다음 옛 왕실의 적통(嫡統)이 왕위를 이었음과 초나라가 되살아났음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리고 공공연하게 진나라에 대한 설한(雪恨)과 보수(報수)를 내걸며 흩어져 숨어있던 옛 초나라의 세력들을 끌어 모았다.
그때 가장 먼저 찾아든 게 송의(宋義)가 이끄는 무리였다. 송의는 대대로 상경(上卿)의 으뜸인 영윤(令尹)을 낸 초나라 문벌(門閥)의 자손으로 그 자신도 유왕(幽王) 말년에 영윤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 송의가 한 떼의 옛 초나라 벼슬아치들과 그 가솔을 이끌고 설현으로 찾아왔다. 송의 자신의 가솔을 합쳐 5백 명에 가까운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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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심이 회왕의 현손(玄孫)임을 증명하고, 그의 양치기 노릇은 진나라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함이었음을 밝혀준 일로 송의는 처음 한동안 항량에게 매우 요긴한 사람이었다. 다같이 쫓겨 숨어사는 처지면서도 송의는 일찍부터 웅심을 찾아내 몰래 오가며 지내왔다. 거기다가 송의는 또 애왕(哀王)이 참변을 당할 때도 초나라 조정에 있었던 터라, 누구보다 진상을 잘 알고 있는 그의 증언은 아무도 웅심의 혈통을 의심할 수 없게 하였다.
하지만 그 일을 빼면 송의는 항량에게 전혀 반가운 사람이 못되었다. 우선 항량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송의가 찾아온 대상이었다. 송의는 지금까지 모여든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항량을 따르려 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초왕(楚王) 웅심을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를 따라온 옛 초나라 조정의 벼슬아치들도 그랬다. 그들도 항량의 실권을 굳이 무시하려 들지는 않았지만, 충성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새로 초왕(楚王)이 된 웅심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온 것은 달리 보면 항량의 진중에 작지만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세력이 섞여들었음을 뜻한다.
창칼을 잡고 싸우는 데도 쓸 수가 없고 계략을 짜는데도 크게 도움이 안되면서도 먹이는데는 여느 병졸들보다 더 많은 곡식과 돈을 써야하는 그 가솔들도 그랬다. 그들은 피붙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의 방계(傍系)까지 싸안은 데다 노비까지 거느린 기이한 유민집단으로 말많고 탈 많아 다루기가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아무 소용없게된 옛 벼슬이나 가문은 서로간 또 어찌 그리 깐깐하고 자잘하게 따져대는지.
(용케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었구나. 골치 아픈 무리들이다….)
항량은 그렇게 한탄했으나 초나라 왕실의 권위에 의탁하기로 한 이상 그들은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짐이었다.
한신이 칼을 차고 항량을 찾아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처음 항량은 그 훤출한 용모에 반해 한신을 무겁게 쓰고자 했다. 그러나 주변에 한신을 잘 아는 자가 있어 헐뜯어 말하였다.
“저 자는 회음(淮陰) 땅을 떠돌던 하찮은 건달입니다. 멀쩡한 생김에 큰칼을 차고 다니며 왕손(王孫)을 자처하지만, 그 뜻이 비루한데다 몸을 함부로 굽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온 자입니다. 하향(下鄕)마을의 남창정장(南昌亭長)에게 밥을 얻어먹고 지내다가 그 아내가 구박하자 성밖 물가에서 남의 빨래를 해서 살아가는 여인[표모]에게서 밥을 빌어먹기도 하였습니다. 또 한번은 저잣거리 불량배가 시비를 걸어오자 그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어지나가 시비를 피한 겁쟁이기도 합니다.”
항량이 원래 귀가 얇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 말을 듣자 한신을 무겁게 쓸 마음이 없어졌다. 병졸로 내치려 하는데 범증이 말렸다.
“저 사람의 생김이 웅장하니 가까이 두고 써 보시지요. 집극랑(執戟郞)을 삼으면 장군의 위의(威儀)에도 크게 보탬이 될 것입니다.”
집극랑이라면 창을 들고 장수를 호위하는 하급 무관이었다. 곧 한신의 키가 크고 몸집이 좋으니 곁에 두어 의장(儀仗)과 경호에 함께 서란 뜻이었다. 이에 항량은 한신을 집극랑으로 주변에 머물게 하였으나 그 재주를 유별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 밖에 크고 작게 무리 지어 찾아오는 옛 초나라의 무장이나 귀족들도 많았다. 더러는 장수로 보태고 더러는 병졸에 들였지만, 대부분은 송의의 무리처럼 거느리기에 거추장스러우면서도 군량만 축내는 유민에 지나지 않았다.
유방을 비롯한 여러 별장(別將)들도 설현으로 자신의 세력을 불러들였다. 항량과 범증이 도맡고는 있지만 그래도 한 나라를 세우는 셈이라, 여러 가지 논의로 그들도 설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까닭이었다. 자기들이 거느린 장졸을 단속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불러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항량의 장수들과 유방의 장수들이 얽히게 되면서 뒷날의 쟁패(爭覇)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여러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만남 중에서 무엇보다 뜻깊은 것은 장량과 항백의 만남일 것이다. 무슨 일인가로 잠시 항량의 본진을 떠나 있다가 돌아온 항백은 어느 날 유방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진중을 가로지르는 장량을 보고 반가움을 이기지 못했다. 그대로 자리를 차고 일어나 장량에게로 달려갔다. 장량도 항백을 알아보고 그의 두 손을 맞잡으며 반가워 어찌할 줄 몰랐다.
“장량 선생!”
“항 대협(大俠)!”
가만히 헤아려 보니 헤어진 지 3년 남짓, 그러나 참으로 긴 3년이었다. 헤어질 때만 해도 시황제의 시절이라 서로에게 모든 일이 그저 아득할 뿐이었으나, 그 사이 세상은 뒤집히고 둘 모두 천하 풍운의 한가운데 끼여들게 되었으니 감회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오중(吳中)에 있다던 제씨(弟氏)와 조카가 바로 항량 항우 두 분 장군이었구려.”
이윽고 먼저 마음을 가라앉힌 장량이 그렇게 자신의 짐작을 털어놓았다. 항백도 저만치 앞서 가는 패공 유방 때문에 짐작 가는 바는 있었으나, 짐짓 물음으로 장량의 말을 받았다.
“선생은 어떻게 이 설현으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장량이 지난 3년 동안 있었던 일과 유방을 만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들려주자 항백도 하비(下비)를 떠난 뒤의 일을 추려 말한 뒤 장량을 자신의 거처로 청했다.
“그때 저는 몇 년째 진나라 관병(官兵)들에게 쫓기느라 몸은 고단하고 마음은 외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선생의 따뜻한 돌보심이 없었다면 이 오늘이 있기나 하겠습니까?”
장량이 그 거처로 따라가자 항백은 크게 술상을 차려내며 새삼 지난날 하비에서 돌보아준 은덕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뒤 다시 헤어질 때까지 두 사람은 시간만 있으면 한 장막에 머물면서 정을 더욱 두텁게 했다. 뒷날 홍문(鴻門)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해 천하의 판세를 바꾸어 놓게 될 두 사람의 정이었다.
항량이 장량을 별장(別將)인 패공 유방의 수하가 아니라 자신의 막빈(幕賓)처럼 대하게 된 것도 항백 덕분이었다. 항백이 따로 데려와 장량을 만나보게 된 항량은 곧 그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비록 유방 밑에서 군마(軍馬)나 다스리는 구장(廐將)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뒤로는 장량을 계포나 종리매 못지않게 정중히 대했다.
하후영과 한신의 만남도 그때 있었다. 나중에 등공(등公)이 된 하후영은 대단찮은 죄로 목이 베이게 된 한신을 구해주어 한(漢)나라에 크게 보탬이 되게 하는데, 사기(史記)에는 그게 한신의 멀쑥한 허우대 때문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은 그때 태복(太僕)으로 유방의 수레를 몰고 다니던 하후영이 항량의 집극랑으로 있는 한신을 자주 보아 눈에 익은 인상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방이 정공(丁公)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계포의 외삼촌 되는 정공은 그때 항량의 장수로 있었는데, 솔직하고 쾌활한 유방의 인품에 반해 은근히 호감을 품었다. 뒷날 싸움터에서 유방에게 인정을 베풀었다가, 항우를 낭패시켰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자신도 유방의 독특한 통치술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된다.
나중에 초한(楚漢) 쟁패에서 많은 초나라 장수들이 패공 유방에게 투항하는데, 그것 또한 두 세력이 그렇게 전열(戰列)을 함께 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그때 익힌 얼굴 때문에 그렇게 오고 감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한편 항량은 범증의 유세(遊說)에 따라 웅심을 초나라 왕으로 세우기는 했으나 날이 갈수록 무슨 뻑뻑하고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세력은 틀림없이 그전보다 크게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그만큼 번거롭고 성가신 일도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를 괴롭힌 것은 옛 초나라의 왕족 부스러기와 귀족들, 그리고 벼슬아치들이었다. 송의가 이끌고 온 이들만 해도 넌더리가 날 지경인데 회왕이 서고 초나라가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그 몇 배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회왕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현청으로 몰려가 항량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소란을 떨었다.
회왕 앞에 머리 조아린 그들은 기억에도 없는 옛 왕실의 영화와 권위를 끊임없이 되뇌어 그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양치기소년 속에 불안스레 웅크리고 있던 회왕의 권력욕을 들쑤시고 부추겼다. 쓸모없으면서도 번잡하기만 한 왕실의 격식과 의례를 되살려 항량의 장졸들을 헷갈리게 하였으며, 항량에게조차 자신들의 몸에 밴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여 그를 까닭 모르게 맥빠지고 어이없게 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항량을 짜증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몰려듦으로서 전에 없이 거센 관제(官制)정비 요구에 내몰리게 된 일이었다. 하기야 나라를 세운 이상 그것을 유지할 제도를 갖춰야 하고, 제도가 갖춰지면 그걸 맡아 일할 백관(百官)을 두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항량에게는 그 모든 게 겉치레요 인력과 조직의 낭비로만 보였다.
(결국은 이 범증이라는 자도 싸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겨우 천하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처지에 주제넘은 일을 한 것은 아닐까. 늙은 책상물림의 공론에 넘어가 너무 일찍 초나라 복국(複國)의 짐을 떠맡아 버린 것은 아닌가….)
항량은 한때 그렇게 은근히 후회하는 마음까지 일었다. 그러나 범증은 태연하기만 했다.
“이름뿐인 나라의 부서를 정하고 백관을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장군을 위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천하를 부리려면 실세를 움켜잡고 있는 것만큼이나 명목의 존귀(尊貴)도 중요합니다. 이 참에 비록 명목뿐이나마 초나라 왕실의 위엄을 빌려 장군의 존귀를 더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는 며칠 지나지 않아 사람의 이름과 관작이 가지런히 적힌 죽간(竹簡)을 한 두름[卷] 내밀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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