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91>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3년 10월 9일 17시 46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宋義를 베고 시루와 솥을 깨다③

진(秦) 이세 황제 3년 12월, 항우는 장함의 대군에게 에워싸여 위태로운 거록(鋸鹿)을 구하기 위해 군사 5만을 이끌고 장하(장河= 衛河의 지류로 장水라고도 한다)를 건넜다. 강을 건너자마자 항우는 장졸들을 불러 모아놓고 소리쳤다.

“배는 모두 부수거나 바닥에 구멍을 뚫어 강에 가라앉히도록 하라! 우리가 그 배를 타고 되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싸움에 지면 죽음이 있을 뿐이니 돌아올 배가 무슨 소용이랴. 싸움에 이겨 거록을 구해도 마찬가지다. 진군을 뒤쫓아 서쪽으로 가서 함양을 치고 포악한 진나라를 둘러엎을 것이니, 돌아올 배는 쓸모가 없다.

군량은 사흘치만 남기고 모두 버려라! 장함에게 지면 곡식을 먹을 목숨이 붙어있지 않을 것이요, 이겨 조나라를 구하면 조나라의 곡식을 먹게될 것이니, 무겁게 여러 날 군량을 지고 다닐 까닭이 무엇이냐?. 국과 밥을 짓는 솥과 음식을 찌는 시루[증]는 모두 깨어버리고 막사도 불살라버리도록 하라! 또한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먹이고 재워야할 몸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요, 이기면 진나라의 솥과 시루를 뺏어 음식을 만들고 그 막사에 자면 된다.”

그렇게 필사(必死)의 각오를 밝히니 장졸들도 모두 감동해 그를 따랐다. 이기지 않고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서로 다짐하며 배를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부수었다. 그런 다음 오직 사흘 치의 양식만을 지닌 체 진군(秦軍)과의 결전을 벼르며 장하를 뒤로했다.

그 바람에 한낮이 되어야 길을 떠난 초나라 군사들은 그날 해질 무렵 폐허가 되다시피 한 조나라의 옛 도성 한단(邯鄲)에 이르렀다. 한단이 그 모양이 된 까닭은 한 싸움으로 성을 떨어뜨린 장함이 그 성벽을 허물고 그 안에 살던 백성들을 모두 하남(河南)으로 흩어버린 탓이었다. 그곳에서 하루 밤을 군사들을 쉬게 한 항우는 다음날 일찍부터 군사들을 북상(北上)시켜 다시 해질 무렵에는 극원(棘原)으로 다가들었다.

항우가 송의를 목베 초나라의 군권(軍權)을 잡으면서 구차한 말장(末將)의 직책을 벗어나 군사(軍師)의 자리를 되찾게된 범증이 말했다.

“여기서 잠시 군사를 쉬게 하다가 날이 어둡거든 다시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길을 두르더라도 극원을 피해 가야 합니다.”

“그건 왜 그렇소?”

항우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항량이 죽은 뒤로 항우는 전처럼 범증을 믿지 않았다. 군사로서 항량 곁에 있었으면서도 정도(定陶)에서의 참패를 막지 못했다는 데서 품게된 의심 때문일 것이다. 그런 항우의 심중을 모를 리 없는 범증이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극원에는 장함의 본진이 있습니다. 우리가 극원으로 들어가면 바로 적의 주장(主將) 장함과 맞서게 되는데, 그리되면 장함은 열에 아홉 시일을 끌며 대군을 한 곳으로 집중한 뒤에 우리를 덮쳐올 것입니다.”

“그럼 간명하고 좋지 않소? 한 싸움으로 모든 것이 판가름 날 테니.”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장함의 대군은 20만이라 하나 실제로는 30만을 훨씬 웃돈다고 합니다. 장함이 거듭 싸움에 이기자 진왕(陳王)의 기의(起義)에 쫓겨 흩어졌던 진나라의 옛 관병(官兵)들이 다시 기세를 회복해 모여든 까닭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앞서간 당양군 경포와 포장군의 군사가 온전하다 해도 7만을 채우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마저도 장졸의 태반은 두 달 전에 바로 그 장함에게 호된 맛을 보고 죽을 고비를 넘긴 자들입니다. 그런 7만으로 집중된 30여만의 적을 정면으로 받아서는 결코 승산이 없습니다.”

“그럼 여기까지 와서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기라도 하자는 말이오?”

“그게 아니라, 곧장 거록으로 다가들어 성을 에워싸고 있는 왕리(王離)와 극원에 있는 장함 사이로 파고들자는 것입니다. 듣기로는 적장(敵將) 소각(蘇角)과 섭간(涉閒)도 따로 군사를 이끌고 용도(甬道)를 지키는 일을 맡아보고 있다 하니, 그렇게 하면 우리는 절로 적을 세 토막 네 토막 내어 싸우는 셈이 됩니다.”

“그 말은 동시에 서너 갈래의 적에게 에워싸일 수도 있다는 뜻이 되지 않겠소?”

항우는 누구보다도 싸움의 기미에 민감한 장수였다. 범증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게 아니었으나 항량의 죽음이 여전히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 그렇게 어깃장을 놓게 했다. 범증이 참을성 있게 받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시의(時宜)만 적절하면 이번에는 오히려 우리가 집중된 힘으로 분산된 적을 치는 이로움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곧 적이 집중할 틈을 주지 않고 하나씩 끌어내 차례로 쳐부순다면 아무리 대군이라도 겁날게 없습니다.”

“한꺼번에 우리 군사 만큼씩만 쳐부순다 해도 다섯 번은 힘든 싸움을 치러야겠군.”

“그 배로 싸워야 될지도 모르지요. 지금까지 장함은 싸움에 져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들이는 일뿐만 아니라, 새로운 군사를 모아들이는데도 남다른 재주를 보여왔습니다. 따라서 집중된 힘으로 분산된 적을 친다고 해도, 다른 제후들의 허술한 군사들로는 애초부터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장군과 우리 초나라 군사라면 넉넉히 해낼 수 있습니다. 장군의 무위(武威)와 우리 초나라 군사들의 용맹이 있어 이 계책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항우는 진작부터 범증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고 있었다. 항량의 죽음 때문에 뒤틀린 심사를 온전히 다스리지는 못했지만 거기까지 듣자 더는 어깃장을 놓지 않았다.

“알겠소. 군사의 가르침을 따르겠소이다.”

한결 풀린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곧 군령을 내렸다.

“여기서 행군을 멈추고 저녁을 지어 먹이도록 하라. 밤이 깊을 때까지 쉬다가 극원을 에둘러 거록으로 갈 것이다!”

그리하여 극원을 우회한 항우와 초나라 군사들이 가만히 거록 남쪽 벌로 밀고든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항우는 날래고 눈치 빠른 군사들을 풀어 당양군 경포와 포장군을 찾아보게 한 뒤 남은 장졸들은 다시 날이 밝을 때까지 쉬게 했다.

그때 거록 성밖 벌판은 성을 들이치는 진나라 군사들과 구원을 온 제후(諸侯)의 군사들이 세운 진채로 어지러웠다. 진나라 군사들의 진채 중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성을 에워싼 왕리의 진채였다. 15만 군사를 거느린 왕리는 농성이 길어지자 자신의 진채에다 누벽(壘壁)을 쌓았는데, 다시 용도(甬道)가 그 누벽에 이어져 멀리 황하까지 이르렀다.

그 다음은 5만 군사로 용도를 지키는 소각의 진채였다. 용도가 성한지를 잘 살필 수 있는 언덕 여러 곳에 나누어 세웠으나 그 사이에 비마(飛馬)를 띄워 서로 연결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그리고 다시 왕리와 소각의 진채와 더불어 솥발[鼎足]의 형세를 이루며 펼쳐져 있는 게 5만의 군사로 뜻밖의 변화에 대응하기로 되어있는 섭간의 진채였다.

연(燕)나라 제(齊)나라를 비롯해 조나라를 구원하러 온 여러 갈래의 제후군(諸侯軍)은 그런 진나라 군사들의 진채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원을 이루며 진채를 세웠다. 그들 중에는 장이의 아들 장오(張敖)가 대(代)땅에서 거둔 군사 만여 명과 진여가 이끈 하북군(河北軍) 수만이 세운 진채도 섞여있었다. 모두가 싸우러 왔다기보다는 겁먹은 구경꾼처럼 높고 두터운 누벽 뒤에 숨어 형세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날이 밝자 전갈을 받은 경포와 포장군이 이끌고 간 군사들과 더불어 항우를 찾아왔다. 장졸 모두가 고달프고 지친 행색이었다. 항우가 은근히 나무라는 말투로 경포에게 물었다.

“군사 2만을 대군이라 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적의 한 갈래 인마는 쳐부술 수 있을 것이오. 거기다가 장군의 용맹 또한 남다른데 실로 알 수 없구려. 보름이 넘도록 작은 전과(戰果)도 없이 쫓기기만 하셨다니 어찌된 일이오?”

경포가 잠깐 무안한 낯빛을 했다가 문득 멀리 벌판 사이에 드러나 있는 긴 담벼락 같은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저 용도(甬道) 탓이었습니다.”

그 말에 항우가 경포가 가리킨 곳을 찬찬히 살폈다. 용도는 양편에 높고 두텁게 담을 쌓은 길로서 위가 열린 땅굴 같은 것이었다. 원래는 시황제 때 황제의 움직임을 여느 백성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함양(咸陽) 인근의 궁궐 사이에 만든 길이었으나, 그 무렵 장함은 그 용도를 군사적으로 쓰고 있었다.

“용도가 어쨌기에?”

“진나라는 저 용도를 통해 군량을 나르고 군사들을 옮기니 밖에서는 저들의 움직임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용도를 끊으려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소각의 군대가 벼락같이 들이치고, 다시 섭간이 그 뒤를 받쳐주니 저희 군사로는 당해낼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어떤 때는 용도 안에서도 진군이 뛰쳐나와 세 겹 네 겹으로 우리를 에워싸고 맙니다. 그 바람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군사만 상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곁에서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범증이 문득 경포에게 물었다.

“용도를 끊기 시작하고 얼마 만에 소각의 군사가 나타났소?”

“처음 3천은 두 각(刻=15분)이 되기 전에 달려왔습니다. 어름으로는, 용도를 끊는데 한 시진(時辰=두 시간)을 끌면 소각이 이끈 5만 군사를 모두 맞아야할 것이고, 다시 한 시진을 더 끌면 섭간의 유군(遊軍) 5만에다 용도에서 쏟아져 나온 왕리의 군사까지 등뒤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초나라 쪽으로 보아서는 결코 반가운 얘기가 못되었으나 범증의 얼굴은 왠지 갈수록 밝아졌다. 항우가 들으라는 듯 짐짓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용도를 따라 달려온 군사들은 그 수가 적고 전면(前面)이 좁아 걱정할게 못된다. 또 성을 에워싸고 있는 왕리의 대군은 길이 멀 뿐만 아니라 함부로 에움을 풀고 진채를 버릴 수가 없어 이곳까지 이르는데 적어도 하루 날은 걸릴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제자리에 주저앉아 우리가 가기를 기다릴 수도 있고….”

“무슨 뜻이온지?”

이왕 범증의 계책을 받아들기로 해서인지 항우가 솔직하게 물었다. 범증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용도가 잘게 분산된 적을 차례차례 우리 앞으로 불러들이는데 미끼가 되어 줄듯합니다. 이곳에서 먼저 군사 약간을 내어 용도를 끊으면, 그걸로 우리는 이곳에 앉아 소각과 섭간의 군사를 나누어 불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우리는 대군을 들어 그들을 차례로 무찌른 뒤, 다시 전군을 들어 왕리의 진채를 들이치면 됩니다. 그때 성안이 호응하여 왕리마저 꺾어버릴 수 있다면 극원에 있는 장함은 전혀 걱정할 게 없습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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