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92>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3년 10월 16일 18시 27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렇지만 장함이나 왕리(王離)가 미련스레 자신의 진채에 눌러앉아 소각(蘇角)과 섭간(涉閒)이 차례로 무너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소?”

항우가 문득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범증이 태평스레 대꾸했다.

“어제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극원(棘原)을 밤길로 가만히 우회한 것은 장함이 움직이기 전에 거록(鋸鹿)의 싸움을 끝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싸움을 서둘러서 소각과 섭간과 왕리의 패보(敗報)가 잇따라 극원에 이르도록 하면 장함이 제아무리 침착한 장수라도 얼이 빠져 쉽게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소각과 섭간을 차례로 쳐부수는 동안에 왕리가 전군을 들어 맞서 오는 것도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왕리는 장함을 따라 나선 이래 계속되는 승리에 취해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의 싸움 전체를 통괄하는 주장(主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록성을 에워싸고 들이치라는 명은 받았지만 소각과 섭간을 구하라는 명은 받지 않았으니, 설령 왕리가 소각과 섭간의 위급을 안다 하더라도 그들을 구하기 위해 함부로 에움을 풀고 이쪽으로 대군을 내지는 못합니다. 그보다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굳게 제자리를 지키며 우리가 그리로 밀고들 때까지 기다리기 십상일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난 항우는 더 묻지 않았다. 논의는 그것으로 되었다는 듯, 먼저 밤길을 달려온 장졸들을 배불리 먹여 쉬게 하고 자신도 군막에 들어 전포를 걸친 채 코를 골았다. 그러다가 해가 높이 떠오른 뒤에야 장수들을 불러 모으더니 미리 짜놓은 듯 명을 내렸다.

“당양군과 포장군은 이곳의 형편을 익히 아니 오늘 싸움에서 앞장을 서 주어야 겠오. 각기 군사 만 명을 이끌고 나가 저 앞 언덕 곁의 용도(甬道)를 허물어 버리시오. 십리 거리로 나누어 용도의 벽을 허물되 군사의 반은 허물어지지 않은 용도 뒤에 숨겨 두었다가 소각의 군사들이 오면 맞받아 치시오. 적병이 만 명이 넘어서면 이곳 본진의 구원이 있을 것이니 두려워할 것 없소.”

먼저 경포(경布)와 포장군을 불러 그렇게 시킨 뒤에 다시 종리매(鍾離매)와 용저(龍且)를 불러냈다.

“종리 장군과 사마(司馬) 용저는 각기 1만 군사를 이끌고 당양군과 포장군을 지켜주라. 언덕 그늘에 숨어 살피다가 적병이 일만이 넘거든 각기 달려나가 여지없이 무찔러버려라! 적을 하나라도 살려보내 다시 우리에게 창칼을 겨누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런 다음 남은 장졸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소리쳤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다리다가 소각이 전군을 이끌고 나타나면 일시에 나가 들이친다. 소각은 내가 잡을 것이니, 너희들도 저것들의 갑옷 한 조각 성하게 돌아가게 해서는 아니 된다!”

이에 장졸들은 명을 받은 대로 움직였다. 먼저 경포와 포장군은 각기 받은 군사를 이끌고 용도로 다가가 십리 사이를 두고 이쪽 저쪽에서 용도의 담벼락을 허물기 시작했다. 남은 장졸들은 얕은 계곡과 언덕 그늘에 숨어 진군(秦軍)의 반격을 기다렸다. 항우도 보검을 차고 오추마(烏추馬)에 높이 올라 변화를 지켜보았다.

“온다!”

경포가 용도를 부수기 시작한지 일각(一刻)이나 제대로 지났을까, 벌판 멀리 서북쪽에서 부옇게 먼지가 일며 한 떼의 인마(人馬)가 달려왔다. 대략 한 개 사(師=2천5백) 남짓해 보였는데, 백여 기(騎)를 앞세우고 달려오는 기세가 여간 날카롭지 않았다. 검은 기치나 보졸(步卒)들까지 몸통에 번쩍이는 갑옷을 걸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진나라 군사들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경포가 용도 허물기를 그만두고 덮쳐오는 진군을 맞받아 쳤다. 믿는 데가 있어서인지 그런 초군의 기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곧 한바탕 혼전이 용도 곁에서 벌어졌다.

병장기와 조련에서 앞서고 먼저 공격한 기세가 있어서인지 한 동안은 진군이 우세해 보였다. 그러나 미리 대비하고 있은 데다 머릿수에서도 앞서는 초군(楚軍)이 곧 전세를 뒤집었다. 다시 일각이 지나기도 전에 주춤거리기 시작하던 진나라 군사들은 경포가 범처럼 내달아 저희 장수를 찔러 죽이자 그대로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창칼을 끌고 되돌아서 달아나는 군사들이 생겨났다.

그때 다시 용도 안에서 한 떼의 진군이 함성과 함께 뛰어나왔다. 땅에서 홀연히 솟은 듯 나타난 군사라 승세를 타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그들을 보고 움찔했다. 그러나 밀리기 시작하던 진나라 군사들에게는 그만큼 힘이 되었다. 달아나던 자들도 걸음을 멈추고 창칼을 다시 꼬나 잡았다.

그 바람에 진군과 초군 사이에 다시 한차례 격돌이 있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전날 범증이 헤아린 대로 용도의 폭이 좁아 한꺼번에 많은 군사들이 나올 수 없는 데다, 용도 안에서 뛰쳐나온 진군의 머릿수 자체가 그리 많지 못했다. 겨우 100여 명 뛰쳐나온 걸로 끝나자 전세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오래잖아 용도를 지키려 달려왔던 진군은 흠씬 두들겨 맞은 개 마냥 꼬리를 사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시 서북쪽에서 부옇게 먼지가 일며 한 떼의 인마가 다가왔다.

“적병이다. 적병이 다시 몰려온다!”

그같은 군사들의 외침에 항우가 눈길을 모아 먼지 이는 쪽을 보니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군세가 컸다. 적어도 처음에 온 군사들의 대여섯 배는 되어 보였다. 소각이 다시 일군(一軍=1만 2천 5백명)쯤을 급히 긁어모아 보낸 듯했다.

본진에서 응원군이 오자 진군의 기세는 달라졌다. 달아나던 군사들이 되돌아서서 그들과 합세하니 다시 검고 세찬 파도가 경포가 이끈 1만 초군을 휩쓸어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없었다. 이번에는 언덕 그늘에 숨어 기다리던 종리매의 군사들이 함성과 함께 달려나갔다.

“저 장수가 혹시 소각 아니냐?”

항우가 앞서 말을 달려오는 진나라 장수를 가리키며 곁에 있는 병졸에게 물었다. 경포에게 사로잡혀 항복한 진병(秦兵)으로 소각을 비롯해 진나라 장수들의 얼굴을 잘 안다하여 특히 곁에 불러놓은 자였다. 그 병졸이 목을 길게 빼고 건너다보다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소각은 아니고, 그 부장(部將) 염웅(염雄) 같습니다.”

“소각의 부장이라 - 그럼 종리매에게 맡겨도 되겠구나.”

항우가 그렇게 말하며 움켜쥐었던 보검 자루를 놓았다. 그 사이 진나라와 초나라의 응원군은 경포가 허물던 용도 근처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한바탕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거록에서는 첫 번째의 접전이라 양쪽 모두 기선을 제압 당하지 않으려고 가진 힘을 다했다. 그렇게 되자 승세는 다시 머릿수가 많고 믿는 바가 더 든든한 초나라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때 다시 그 승세에 돌이킬 수 없는 쐐기를 박는 일이 벌어졌다. 항우가 믿은 대로 종리매가 달려나가 앞장선 적장을 큰칼로 찍어버린 것이었다. 저희 대장이 두 토막이 나 말 등에서 떨어지는 걸 본 진군은 사태가 나듯 허물어져 쫓기기 시작했다.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초나라 군사는 그런 진군을 뒤쫓으며 마음껏 베고 찔렀다. 용도를 지키려 나왔던 소각의 군사들은 그 싸움에서 태반이 죽거나 사로잡혀 성하게 저희 진채로 돌아간 것은 5000, 6000 밖에 안되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흠잡을 데 없는 초군(楚軍)의 승리였고, 범증의 헤아림은 잘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그 다음이 그렇지가 못했다. 범증과 항우는 곧 소각이 전군(全軍)을 들어 되받아 치고들 줄 알았으나 짧은 겨울날이 저물어 오도록 진군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소각이 어찌된 일인가? 야습(夜襲)이나 하겠다는 건가?”

한바탕 모진 싸움을 벼르며 긴장하여 기다리던 항우가 알 수 없다는 듯 범증에게 물었다.

“저들이 우리 계책을 알아차린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씩 나뉘어 우리에게 맞서기보다 힘을 모아 한꺼번에 밀어부칠 속셈인 듯 합니다.”

“그래서 어찌 하겠다는 것이오?”

“소각과 섭간만 힘을 합쳐도 거느린 군사가 10만이 넘습니다. 우리 군사의 두 배에 가까우니 우리에게는 매우 힘든 싸움이 될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 싸움에 시일을 끌어 소각과 섭간이 왕리까지 이곳으로 끌어들이게 되면 실로 큰일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그리 크게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결국 되도록 빨리 우리 군사 하나가 진군 둘만 잡으면 된다는 얘기 아니오? 하지만 두 번 싸워야할 걸 한번에 해치우면 되니 소각과 섭간이 함께 몰려오는 게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을 듯도 싶소.”

그처럼 기죽지 않은 항우의 말을 듣자 범증도 밝은 얼굴이 되어 격려하듯 한 계책을 내놓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왕리의 원군이 오는 것을 미리 막아 두어야 합니다. 오늘밤 이곳 지리에 밝은 장수 하나를 골라 그에게 날랜 군사 3000을 주고 왕리의 진채를 멀리서 에워싸도록 하십시오. 그들 모두 횃불을 밝혀들고 북과 징을 울리면서 금세라도 들이칠 듯한 형국을 만들어 보이면, 놀란 왕리는 자기 진채를 지키는데 급급해 감히 남을 구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알겠소. 그래서 왕리를 사흘만 제 진채에 묶어둘 수 있다면, 우리는 소각과 섭간의 군사를 쳐부수고 무사히 거록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오.”

범증의 말을 금세 알아들은 항우는 그렇게 말하고 장수들을 모두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 모으게 했다.

“이제 싸움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 싶소.치밀한 계책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민한 감각으로 변화에 응하고 일당백의 투혼으로 제 한 몸을 내던지는 것만이 이기는 길이 되었소이다. 내일도 오늘 낮처럼 우리 군사를 다섯 갈래로 나누어 힘을 다해 싸우되, 서로 연결을 유지하여 언제든 한 덩어리로 뭉칠 수 있도록 하시오”

항우는 그렇게 명을 내리고 따로 환초(桓楚)를 불러 말하였다.

“장군은 쫓기는 무리를 이끌고 여러 해 숲 속을 떠돌며 지낸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잠시 유군(遊軍)이 되어 며칠만 왕리를 지금 있는 곳에 묶어 주시오. 이곳 지리에 밝은 부장(部將)과 병졸 3000을 줄 테니, 가만히 북쪽으로 올라가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왕리의 진채를 멀리서 에워싸고 금세라도 치고들 듯 겁을 주면 되오. 그렇게 사흘만 왕리를 거록성 아래 잡아둘 수 있으면 이번 싸움은 우리가 이길 수 있소!.”

환초가 곁에 있던 범증에게서 다시 세세한 계책을 들은 뒤 3000 인마와 함께 떠나자 항우는 남은 장졸들은 배불리 먹인 다음 그 밤을 편히 쉬게 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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