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97>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8시 24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더해지는 깃과 날개(1)

창읍(昌邑)은 산양군(山陽郡)에 속한 현(縣)이다. 강북(江北)이기는 해도 창읍의 2월은 제법 봄기운이 돌았다. 그러나 창읍 성밖 벌판에 친 패공 유방의 아침 군막 안은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전날 힘들여 성을 들이쳤으나 군사만 상하고 쫓겨난 터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 해 9월 초나라 회왕(懷王)의 명을 받고 항우와 길을 나누어 서쪽으로 떠난 패공은 탕군(탕郡)을 지나 양성(陽城)에 이르렀다. 아직 거록(鋸鹿)의 싸움에 불려가지 않은 진나라 장수 왕리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는 땅이었다. 거느린 군사가 겨우 1만 남짓이었으나 패공은 기세 좋게 양성을 들이쳤다. 풍읍과 패현의 건달들이 분발해 양성은 한나절만에 떨어졌다.

힘이 솟은 패공 유방은 다시 군사를 휘몰아 머지않은 강리(강里)로 밀고 들었다. 강리 역시 왕리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으나 패공이 이긴 기세로 들이치자 배겨내지 못했다. 기껏해야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성을 내준 뒤 북쪽으로 달아났다.

강리에서 잠시 군사를 쉬게 한 패공은 다시 성무(成武)로 쳐들어갔다. 진나라 동군위(東郡尉)가 적지 않은 군사와 함께 머물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거기서도 패공은 크게 재미를 보았다. 무엇엔가 고양된 지방관리들과 저잣거리 건달들이 범같이 내달아 동군위를 죽이고 그 군사들을 모두 흩어버렸다. 2세 황제 3년으로 접어드는 10월의 일이었다.

성무에서 달포 남짓을 쉬며 군사를 정비한 패공은 다시 율현(栗縣)으로 군사를 냈다. 그러나 그곳에는 진군이 없고 강무후(剛武侯)란 사람이 군사 4천 여명과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초나라 장수로서 강후(剛侯) 무(武)라고 불러야 옳다고 하는 말이 있었으나, 실은 설현(薛縣)에서 의군(義軍)을 일으킨 장수였다. 패공은 강무후의 군사를 모두 빼앗아 자신의 군세를 2만으로 부풀렸다.

그때 비로소 패공의 움직임을 심상찮게 본 장함이 율현으로 대군을 보냈다. 하지만 때맞춰 그곳에 이른 위(魏)나라 장수 황흔(皇欣)과 사도 (司徒) 무만(武滿=史記에는 武蒲로 되어있음)의 군사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패공은 그들과 힘을 합쳐 진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항우가 소각과 섭간을 죽이고 왕리를 사로잡아 거록을 구했다는 소식을 패공 유방이 들은 것은 율현에서였다. 잇따른 자잘한 승리에 취해 그곳에서 장졸들과 더불어 쉬며 겨울을 나던 패공은 그 놀라운 소식에 슬며시 다급해졌다. 서둘러 군사를 움직여 뭔가 그럴듯한 공을 세워본답시고 고른 게 북쪽에 있는 창읍을 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창읍은 부근의 진군(秦軍)에게는 요긴한 땅이라 지금까지 떨어뜨려 온 변두리 현성(縣城)들과는 달랐다. 그 바람에 2만 군사를 모두 내몰아 성을 치게 하였으나 첫날 싸움에 밀리면서 군사와 물자만 잃고만 것이었다.

(고약하다… 항우는 7만이 못되는 군사로 장함이 거록성 밖에 풀어놓은 진나라의 20만 대군을 깨뜨리고 세 장수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하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이 작은 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구나! )

패공은 침상에 누운 채 괴롭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에든 느긋하기만 하던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전장을 떠돈 일년 남짓 사이에 패공에게 일어난 변화였다.

그때 누가 갑자기 장막을 들치고 들어서며 말했다.

“패공, 일어나셨습니까? 번(樊) 장군이 패공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빈객(賓客)이란 직함으로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노관이었다. 노관은 패공과 한날한시에 난 동갑내기요, 아버지 대(代)부터 친구사이였다. 군막을 함께 쓸 뿐만 아니라, 장수들 중 유일하게 마음대로 패공의 침실을 드나들 수 있었으나, 둘 사이는 그때 이미 주종(主從)을 넘어 군신(君臣)처럼 바뀌어져 있었다.

“번쾌(樊쾌)가 이렇게 일찍? 어쨌든 들라 하라.”

패공이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 옷을 걸쳤다. 패공이 미처 침상을 떠나기도 전에 번쾌가 군막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벌써 갑주에 투구를 받쳐 쓰고 있었다. 칼날만 길이 다섯 자에 너비 세 치로 특별히 벼린 장검이 유난히 긴 허리에 매달려 한층 위엄을 더해주고 있었다. 한때의 방편이었다고는 하나 저잣거리에서 개고기를 썰어놓고 팔던 개 백정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패공이 침상에 걸터앉은 채로 물었다.

“국대부(國大夫)는 이렇게 일찍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

국대부는 관대부(官大夫)라고도 하는데, 번쾌가 싸움터에서 세운 공으로 얻게된 작위 중에 하나였다. 반평생을 친숙하게 불러온 이름을 두고 번쾌를 그렇게 부르는 패공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있었다.

번쾌는 젊었을 적부터 노관과 더불어 패공의 오른팔 왼팔이 되어 그 주먹 노릇을 하였고, 나이 들어서는 패공의 처제 여수(呂須)를 아내로 맞아 그와 동서(同壻)간이 되었다. 그러나 패공의 미소에 감춰져 있는 것은 그런 사사로운 정이 아니라, 대견스러운 신하를 바라보는 주군(主君)의 흐뭇함이었다. 지난 한해 반 동안 보여준 번쾌의 분발과 변모는 그만큼 눈부신 데가 있었다.

처음 패공의 사인(舍人=수행관리)으로 패현을 출발한 번쾌는 호릉(胡陵)과 방여(方與)를 공격할 때부터 무장으로서 남달리 두각을 드러냈다. 두 곳을 평정하고 돌아와 풍(豊) 땅을 지킬 때는 쳐들어온 사수군 (泗水郡)의 어사감(御使監)을 크게 무찔렀고, 다시 동쪽으로 패현을 평정한 뒤에는 설현에서 사수군수(泗水郡守)의 대군을 여지없이 쳐부수었다. 장함의 사마(司馬) 이(夷)와 탕현 동쪽에서 싸워 내쫓고 적군 15명을 목 베어 국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번쾌는 언제나 패공을 따라 다니며 그 곁에서 싸웠는데, 복양현(O陽縣)에서 장함의 군대를 공격할 때는 맨 먼저 성벽 위로 기어올라 공격하고 적군 23명을 목베어 열대부(列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다시 패공을 따라 성양현(城陽縣)을 칠 때도 가장 먼저 성벽 위로 뛰어올라 그 용맹을 드러냈다.

그 뒤 번쾌는 호유향(戶유鄕)을 함락시키고, 이유(李由)의 군사를 쳐부수어 적군 16명을 목벤 공으로 상간작(上間爵) 벼슬을 받았다. 강리(강里)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있던 하간군수(河間郡守)를 쳐부수었으며, 성무현에서 동군(東郡)의 수위(守尉)를 물리칠 때, 적군 16명을 목 베고 11명을 사로잡아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오늘 싸움은 제게 선봉을 맡겨주십시오. 복양에서 그랬듯 앞장서 성벽 위로 뛰어올라 적의 얼을 빼어놓겠습니다!”

“그것도 좋지. 그렇지만 또 국대부를 위험한 싸움에 앞장 세웠다가 나중에 성질 사나운 처제(妻弟)에게 무슨 꼴을 당하라고.”

패공이 빙글거리며 그렇게 받았다. 그러나 번쾌는 공손하면서도 엄숙한 자세를 조금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사사로운 정과 천하의 일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 창읍의 싸움은 우리가 앞으로 더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걸린 중요한 싸움입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싸움이 끝나고 돌아가면 지척에서 처제를 만나야 하니….”

패공이 조금 머쓱하여 그렇게 얼버무리고 있는데 다시 노관이 들어와 알렸다.

“관(灌) 중연(中涓)이 찾아와 뵙겠다고 합니다.”

“관영은 또 무슨 일로?”

“뵙고 말씀 드리겠다 합니다. 번 장군처럼 갑옷투구를 갖추고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유방도 관영이 온 뜻을 짐작한 듯 다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알겠다. 들게 하라.”

노관이 나가고 오래잖아 관영이 들어왔다. 작달막하지만 다부진 몸매가 갑옷투구에 싸여 더욱 굳세고 단단해 보였다. 그 또한 수양현(N陽縣) 저잣거리에서 비단을 팔던 옛날의 그 사람은 아니었다. 지난번 강리에서 진군을 무찌를 때는 앞장서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그 기선을 제압하였고, 성무에서 동군 군위(郡尉)를 무찌를 때도 벼락같은 돌진으로 적의 정면을 돌파하여 그 공으로 칠대부(七大夫)의 작위를 받기도 했다.

관영은 먼저 와 있는 번쾌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때 패공이 관영에게 물었다.

“관 중연은 어제 싸움에서 다치지 않았소?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시오?”

“껍질과 터럭이 조금 상했으나 걱정하실 바 없습니다. 다시 한번 싸워볼 만하니 오늘 성을 칠 때는 제가 한번 앞장 서 보겠습니다.”

그런 관영의 말을 패공이 껄껄 웃으며 받았다.

“여기 번 장군이 와 있는데 또 관 중연이 오셨구려. 짐작에는 주발(周勃)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듯한데.......”

그때 마치 그 말을 받기라도 하듯 노관이 다시 군막을 들치고 들어오며 큰소리로 알렸다.

“주(周) 호분령(虎賁令)이 왔습니다. 역시 뵙기를 청합니다.”

호분령은 호위를 맡는 장수로서, 주발은 패공이 안무후(安武侯)에 탕군장(탕郡長)이 된 뒤부터 패공 곁을 지켜왔다. 그래서 패공의 군막을 거리낌없이 드나들어 와서인지 그날도 패공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 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역시 누에치기로 살아가며 상가(喪家)에서 피리나 불어주던 옛날의 그 주발은 아니었다. 그 역시 강한 활을 잘 쏘는 용사로서 번쾌와 나란히 눈부신 변신을 거듭하고 있었다.

주발이 처음 패공을 따라 나설 때는 관영과 마찬가지로 중연(中涓)이었으나 그 뒤의 분발은 남달랐다. 그는 먼저 호릉과 방여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고, 다시 방여가 패공에게 반역하자 그가 싸움을 맡아 적군을 쳐부수었다. 탕군을 칠 때도 가장 공이 많은 것은 그였으며, 하읍(下邑)을 쳐서 떨어뜨릴 때는 그가 맨 먼저 성루(城樓)에 올라 패공으로부터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패공의 군사 한 갈래를 이끌고 몽읍(蒙邑)과 우현(虞縣)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패공이 장함의 거기(車騎)부대를 공격할 때는 후진(後陣)에 머물러 뒤를 굳건히 받쳐주었다. 위(魏)땅을 쳐서 거둬들였으며, 원척(爰戚)과 동민(東緡) 두 곳을 들이치고 곧장 율현으로 나가 그 성을 떨어뜨렸다. 또 설상(齧桑)을 공격할 때는 주발이 맨 먼저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동아(東阿)성 아래에서 진군을 무찌르고 복양까지 뒤쫓아가 견성(甄城)을 함락시킨 것도 주발이었다. 도관(都關)과 정도(定陶) 두 현을 쳐부수고 완구(宛구)를 빼앗았으며 선보(單父)의 현령을 사로잡았다. 옹구(雍丘)성 아래에서 이유(李由)의 군사를 쳐부술 때 가장 앞서 내달은 것도 주발이 이끈 군사들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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