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01>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3년 12월 18일 18시 46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더해지는 깃과 날개(5)

" 내 이미 진나라의 녹을 먹은 지 오래라 결코 그리할 수는 없네. 힘껏 지키다가 일이 글러지면 성벽을 베고 죽을 뿐, 어찌 한 고을의 수장(戍將)이 되어 싸워보지도 않고 적도에게 항복한단 말인가? 우리 진나라 법으로는 오히려 항복을 권한 자네에게도 무거운 죄를 물어 마땅하네. 하지만 그동안의 정리 때문에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자네의 그 말을 듣지 않은 것으로 할 터이니 더 길게 말하지 말고 객관으로 물러가게. 가서 조용히 쉬다가 날이 새는 대로 진류성을 떠나도록 하게!”

그렇게 잘라 말한 현령은 역이기에게 한번 더 말 붙여볼 틈도 주지 않고 총총히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날이 되었다. 날이 밝아도 성안에서 아무런 기별이 없자 패공은 대군을 풀어 진류성을 에워싸게 했다. 밤사이 인근의 유민(流民)들까지 모두 긁어모아 군사로 꾸미게 하고, 그 사이 사이를 풍읍과 패현의 호걸들이 이끄는 정병(精兵)들로 이어 군세를 위장하니, 성 안에서 보기에는 엄청난 대군이 에워싼 듯했다.

놀란 현위(縣尉)의 전갈을 받고 문루(門樓)에 오른 진류 현령도 그 같은 유방의 군세를 보고는 기가 질렸다.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성벽 아래를 내려보고 있는데, 다시 역이기가 나타나 권했다.

“이제 그만 마음을 돌리게. 권하는 술을 마다하면 벌주를 마시게 되는 법이네. 게다가 이 진류는 내게도 고향 같은 땅이 아닌가. 네 성문 중에 둘은 이미 성안의 뜻있는 이들과 나를 따르는 젊은이들 손에 들어갔을 것이니 성을 지키려 해도 뜻과 같지는 못할 것이네.”

그 말에 현령도 마침내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긴 한숨과 함께 역이기에게 말했다.

“이제 진(秦)의 날도 다했나 보이. 이 또한 하늘의 뜻이라면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이라도 보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군민(軍民)들을 달래 패공의 군사들에게 맞서지 못하게 하고 네 성문을 활짝 열어 항복했다.

화살 하나 허비하지 않고 진류성을 차지하게 된 패공은 몹시 기뻤다. 수십만석 곡식에 말과 병장기를 제대로 갖춘 군사까지 수천명을 더 얻게 되니 그것만으로도 군세가 두 배는 불은 듯하였다. 거기다가 소문을 들은 근처의 유민들이 그 기세에 기대려 모여드니 패공의 세력은 다시 몇 배로 부풀어 올랐다.

패공은 그 모두가 역이기의 공이라 여겼다. 역이기에게 두텁게 상을 내리고, ‘땅을 넓혀준 어른’이란 뜻으로 광야군(廣野君)이라 높여 부르게 했다. 광야군 역이기가 그런 후대에 화답하듯 다시 한 사람 뛰어난 인물을 불러들여 패공을 기쁘게 했다.

“제 아우 상(商)이 제법 장재(將材)가 있어 부릴 만합니다. 지금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여기저기 떠돌고 있는데 제가 불러 패공을 모시게 하겠습니다.”

뒷날 제후가 되고 한(漢)나라의 우승상(右丞相)에 까지 오른 역이기의 아우 역상((력,역)商)은 그 형과는 달리 일찍부터 장수로 이름을 얻었다. 힘이 남다르고 담대한 데다 재략까지 갖춰 인근의 젊은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진승이 봉기하자 그도 따르는 젊은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노략질하며 진나라에 저항했는데, 그 무렵에는 무리 4000명을 거느리고 기(岐) 땅에 머무르고 있었다.

패공도 역상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 역이기를 재촉하다시피 그를 불러오게 했다. 역이기는 그날로 사람을 보내 아우 역상을 진류로 불러들였다. 패공이 역상을 보니 들은 대로 훌륭한 장수감이었다. 이에 역상을 장군으로 삼고 그가 데리고 온 4000명에 진류의 군사들을 보태 거느리게 하니, 패공에게도 풍(豊) 패(沛) 땅 사람이 아닌 장수가 하나 둘씩 늘어가게 되었다.

진류에서 잠시 군사를 쉬게 한 패공은 3월에 들기 바쁘게 서쪽으로 밀고 들어 개봉(開封)을 쳤다. 진류성을 뺏은 기세에다 새로 얻은 역상을 내세워 힘껏 성을 쳤으나 싸움은 패공의 뜻과 같지 못했다. 지난 번 창읍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러 날의 힘든 싸움 끝에 군사만 상하고 물러나야 했다.

하는 수 없이 개봉을 버려두고 서쪽으로 길을 재촉하던 패공은 다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을 만나게 되었다. 패공은 양웅과 백마(白馬)에서 한바탕 싸웠으나 쉽게 승부를 가르지 못하여 다시 여러 날을 서로 밀고 밀리었다. 그러다가 곡우(曲遇) 동쪽에 이르러서야 패공은 비로소 양웅의 군사를 크게 쳐부술 수 있었다.

양웅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형양(滎陽)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뒤늦게야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2세 황제는 그를 본보기로 삼아 무너진 진나라의 군령을 세워보려 했다. 사자를 보내 싸움에 진 죄를 묻고 양웅의 목을 베었다.

그사이 4월이 되고 여름 더위가 몰려왔다. 패공은 양웅을 이긴 기세를 몰아 영천(潁川) 쪽으로 군사를 내었다. 영천군의 치소(治所)인 영양성(潁陽城)은 옛날부터 군사적인 요충이라 싸움이 쉽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오래 날을 끌지 않고 떨어뜨릴 수가 있었다.

영천군은 옛 한(韓)나라 땅이었다. 시황제가 한나라를 쳐 없앤 뒤에 영천군을 만들어 진나라의 서른 여섯 군(郡) 중에 하나로 끼워 넣어 버렸으나 한나라의 유신들은 오래도록 옛 나라를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진승이 봉기한 뒤 다시 한나라를 되세우려고 일어났는데 그 중심이 횡양군 성(成)을 한왕(韓王)으로 받들고 있는 장량(張良)이었다.

패공은 영양성을 얻자 문득 전해 헤어진 장량을 떠올렸다. 오다가다 만났고 함께한 시간도 길지 않았으나 헤어진 뒤로 하루도 잊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때 조상 대대로 모신 한나라를 되일으키려는 장량의 뜻이 워낙 간절하고, 또 까마득히 우러러보던 항량이 이미 허락한 일이라 패공은 어쩔 수 없이 장량을 떠나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 뒤 패공은 연줄만 닿으면 장량의 일을 수소문하고 그의 성패(成敗)를 자신의 일처럼 여겼다. 장량이 한왕 성을 도와 진나라 군사를 무찌르고 옛 한나라 성을 여남은 개나 되찾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군막 안에서 작은 잔치를 벌여 그 일을 기뻐했다. 그러다가 장량이 다시 진나라의 반격을 받아 일껏 얻었던 땅을 모두 되잃고, 몇천 군사와 함께 이리저리 쫓기며 떠돌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올 때는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양성을 차지한 날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저문 뒤에 장수들과 술잔을 나누던 패공이 문득 잔을 내려놓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땅은 자방(子房·장량의 자)의 고국(故國)이다. 한왕과 함께 고단한 형세로 떠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그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는가?”

하지만 방금 힘든 싸움을 한 끝이라 아무도 장량이 있는 곳을 알지 못했다. 모두 대답이 없자 패공의 심사를 잘 헤아리는 노관이 나서서 말했다.

“이제 겨우 한나라 땅 남쪽에 들어선 참이라 아직 장자방 선생의 자취를 수소문해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풀어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그러더니 정말로 다음날 정오가 되기도 전에 패공을 찾아와 말했다.

“지금 장자방 선생은 환원산(환轅山)에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작은 군사로 진나라의 대군을 당해낼 길 없어 그곳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고 있는데, 불시에 군사를 몰고 나와 치고 빠지는 수법으로 진군을 괴롭히고 있는 듯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어렵지 않게 영양성을 얻은 것도 장자방 선생 덕분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까운 성들이 위급하면 원군(援軍)이 될 수 있는 진나라 군사들을 모두 환원산에 끌어들여 그곳에 묶어두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패공은 더욱 장량이 그리워졌다. 오래 생각하는 법도 없이 노관에게 명했다.

“그렇다면 한왕과 자방을 이리로 불러들이라. 이제 우리가 영양성을 차지했으니, 이곳을 근거로 삼아 서로 힘을 합치면 한나라의 옛 성들을 되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함양으로 가는 일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노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패공이 애써 속마음을 감추며 그럴듯한 구실을 댔다.

“근거도 없는 외로운 군사로 함양으로 쳐들어가 본들 무슨 공을 이루겠느냐? 이렇게 되면 잠시 길을 미루는 수밖에 없다. 먼저 한나라의 옛 땅을 되찾아 뒤를 든든히 한 뒤에 함양을 치는 것이 오히려 순서일 것이다.”

그리고 장량을 부르기를 재촉했다. 이에 노관은 하는 수 없이 날랜 군사 몇 명을 뽑아 환원산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떠나기도 전에 성벽 위 망루를 지키던 교위 하나가 급히 달려와 알렸다.

“서북쪽에서 한 떼의 인마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놀란 패공이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서북쪽 성벽 위로 달려가 보니 정말로 부옇게 먼지가 일며 적지 않은 인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 큰 군사는 아닌 듯합니다. 제가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이해 보겠습니다.”

패공 곁에서 함께 내려다보고 있던 번쾌가 그렇게 싸움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때 눈 밝은 주발이 말했다.

“가만,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아무래도 싸우러 오는 군사들 같지가 않소. 좀 더 살펴본 뒤에 군사를 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서북쪽이라면 진나라에서 오는 길목인데, 호분령(虎賁令)은 어찌 그리 보는가?”

패공이 주발을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주발이 여전히 다가오고 있는 군사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느릿느릿 대꾸했다.

“만약 싸우러 오는 군사들이라면 지금쯤은 닫기를 멈추고 진세를 가다듬어야할 것인데 저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보졸(步卒)들이 따라붙기를 기다리지 않고 기치를 앞세운 기병만 먼저 달려오는 품이 마치 성문을 열어주기를 청하러 오는 우군(友軍) 선두 같습니다.”

그때 더욱 눈 밝은 군사 하나가 앞세운 깃발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오는 것은 한나라 군사들입니다. 한왕(韓王)과 신도(申徒·韓나라 官名·大臣) 장량의 깃발이 보입니다.”

그 말에 패공은 펄쩍 뛰듯 기뻐하며 성루가로 달려나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기마를 살펴보았다. 오래잖아 패공도 기치에 쓰인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이어 기마대의 선두에서 호리호리한 몸에 무거운 듯 전포를 걸친 장량의 모습이 보였다. 그 곁에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한왕 성도 알아볼 수 있을 듯했다.

장량을 알아본 패공이 급히 좌우를 돌아보며 외쳤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성문을 열어 장자방과 한왕을 맞아들여라!”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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