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02>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3년 12월 25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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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음에 성문까지 내려가 장량을 맞아들인 패공은 오래 떨어져 있다 만난 옛 벗을 만난 듯 반가워 어찌할 줄 몰라했다. 두 손을 잡고 어루만지다 소매를 끌고 안으로 들면서 장량을 바라보는 패공의 눈가에는 알 수 없는 물기까지 어렸다. 평소 눈앞에 사람이 없는 듯 거침이 없어 거만하게 보이는 데다, 사사로운 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패공에게는 별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별나기는 장량도 마찬가지였다. 패공의 구장(廐將)이었던 적은 있지만, 그때는 이미 한(韓)나라의 신도(申徒=재상)로 한왕(韓王)을 섬겨온 지 한 해가 가까웠다. 그런데도 자신의 주군은 아직도 패공인 것처럼 우러르고 받들었다.

“그때 그리 무심히 떠나보낸 뒤로 내 오랫동안 자방(子房)의 일을 근심하였소. 모든 일이 여의치 못한 것 같아 마음 아파했는데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시오? 환원산(환轅山)에서 여기까지 가까운 길도 아닌데 어떻게 이리 오시게 되었소?”

주객이 자리를 잡고 앉기 바쁘게 패공이 장량에게 물었다. 한왕 성(成)이 장량과 나란히 앉아 있었으나 패공에게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장량이 조금 민망한 눈길로 한왕을 돌아본 뒤 대답했다.

“한원산은 진나라의 대군을 피해 숨기는 좋은 곳이지만, 세력을 길러 한나라의 옛 땅을 되찾기에는 너무 외지고 험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며 부질없이 애만 태우다가 패공께서 이리 오셨다 하기에 밤을 틈타 달려 왔습니다. 패공께서는 관중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나라 땅부터 온전히 회복하여 든든한 근거로 삼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곳 한나라 땅은 형양(滎陽) 성고(成皐) 부근의 곡창지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 많고 물자 넉넉한 성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습니다. 패공께서 그 땅을 되찾아 우리 대왕께 맡기시면 우리 대왕께서도 힘을 다해 패공의 뒤를 받쳐드릴 것입니다.”

마치 패공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온 듯한 말이었다. 자기들끼리는 미리 맞춰둔 의논이 있었던지 한왕 성도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한나라는 결코 패공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며, 이 몸은 개나 말의 수고로움[견마지로]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한왕의 말에는 옛 땅을 되찾으려고 일어섰다가 강한 적군에게 쫓기며 고달픈 한 해를 보내야했던 망국(亡國) 왕족의 처량함이 배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같은 뜻으로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려던 패공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쪽에서 먼저 와서 그렇게 청해 오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타고난 치자(治者)로서의 감각이 되살아났는지, 패공이 갑자기 신중한 낯빛으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한참만에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자방이 헤아림이 그러하다면 기꺼이 따르겠소. 함곡관으로 쳐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나라 땅부터 평정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호쾌하게 대답하고 크게 잔치를 열어 장량과 한왕을 대접하게 했다.

다음날부터 패공 유방의 한나라 땅 공략이 시작되었다. 진류와 영천을 차지하면서 부풀어난 군사에 한왕이 이끌고 온 3000을 보태 패공은 어느새 3만 대군을 일컫는 군세를 거느리게 되었다. 장수들도 풍읍 패현의 맹장들과 역이기 역상 형제를 비롯한 새로운 인재들에다 다시 장량의 지략과 경험이 더해지니, 그 무렵의 어떤 군대보다 층이 두터웠다. 그 둘이 어우러진 무서운 기세로 휩쓸고 나가자 한동안은 아무 거칠 게 없었다.

영양(潁陽)을 나선 패공의 군사들은 보름도 안돼 양성(陽城) 양적(陽翟)을 비롯해 크고 작은 성 여남은 개를 떨어뜨리고 옛 한나라 땅 태반을 휩쓸었다. 그런데 대군이 형양을 지나 성고에 이르렀을 때였다. 한나라 땅의 곡창지대를 손에 넣어 흐뭇해하고 있는 패공에게 갑자기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조나라의 별장(別將) 사마앙(司馬앙)이 하수(河水=황하)를 건너 함곡관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역이기가 여기 저기 풀어놓은 사람들에게서 그 같은 전갈이 오자 패공은 갑자기 다급해졌다. 함곡관으로 들어가면 바로 관중이다. 그런데 관중은 이미 회왕(懷王)의 공언으로 천하 야심가들의 공공연한 전리품이 되어 있었다.

“회왕께서는 먼저 관중을 차지하는 자를 관중왕(關中王)으로 세우실 것이라 했오. 비록 서쪽 길은 우리만을 보내셨으나, 크게 보면 조나라의 별장은 곧 우리 초나라의 별장일 수도 있오. 따라서 사마앙이 먼저 관중을 차지하면 어쩔 수 없이 그를 관중왕으로 세우셔야 할 것이오. 그런데도 우리는 팽성을 떠난 지 반년이 넘도록 이리저리 흘러 다니다가 이제는 한나라 땅을 맴돌며 곡식이나 거두고 있으니 이제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패공이 걱정스런 얼굴로 좌우를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장량이 대답 대신 방금 그 소식을 가지고 달려온 군사에게 물었다.

“사마앙의 군세는 얼마나 된다고 하더냐?”

“중군(中軍)이 5만이요, 후군(後軍) 10만이라고 뒤따라 이를 것이라 하나, 사마앙이 이끈 전군(前軍)은 3만이라 합니다. 그나마도 행군을 본 농부들에 따르면, 군사라기보다는 갈 곳 없어 뒤따르는 유민들이 더 많은 듯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사마앙의 세력은 그리 크지 않은 듯했다. 군사를 일으킨 사람들이면 누구나 열 배 스무 배로 형세를 부풀리어 말하던 시절이었다. 패공도 제대로 된 군사 몇 천명이면 5만 대군이라 우겨왔고, 3만이 겨우 차는 그때는 10만 대군이라고 소문을 내고 있었다. 그것도 항우가 이끄는 30만 후군이 곧 뒤따를 것이라는 허풍과 함께였다.

패공은 당장이라도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사마앙을 막고 싶었다. 그러나 사마앙도 포악한 진나라에 맞서 일어난 조나라의 별장이라 차마 그 뜻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장량이 패공을 대신하듯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군사를 내어 사마앙을 막아야겠습니다. 부근에서 대군이 하수를 건널 수 있는 나루라면 평음(平陰)아래 있는 하진(河津)일 것이니 그리로 가서 기다리시지요.”

“하지만 조나라의 별장이라면 같은 의군(義軍) 아니오? 어찌 대의를 같이하는 우군을 칠 수가 있오?”

패공이 반가운 마음을 숨기고 능청스레 물었다. 장량이 다시 패공이 대고 싶은 핑계를 찾아 주었다.

“사마앙을 치는 것이 아니라 패공의 휘하에 거두시라는 것입니다. 큰소리를 치고 있어도 지금 사마앙의 군사는 몇천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령 하수를 건넌다 해도 함곡관을 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연히 수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듯, 터무니없는 군사로 진군의 경계심만 일깨워 패공께서 가시는 길을 방해할 게 불 보듯 뻔합니다. 차라리 사마앙의 군사를 패공의 휘하에 거두어 두셨다가 나중에 함곡관에 드실 때 한 갈래 별군(別軍)으로 쓰시는 게 낫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주저할 일이 없었다. 패공은 그 밤으로 군사를 거두어 평음으로 옮겼다.

소문이 너무 빨랐던 것인지, 패공이 평음에 자리잡고 기다린 지 사흘이 되도록 사마앙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패공은 군사를 남하시켜 하진 남쪽에서 황하 나루를 끊고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마앙 대신 뜻밖의 급한 소식이 먼저 왔다.

“진나라가 낙양(]陽)에 대군을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양웅을 목 벤 2세 황제가 마음먹고 대군을 보내 영천군(潁川郡) 일대를 평정하려는 것 같습니다. 장수들도 함양에서 새로 뽑아 보내 그 기세가 여간 날카롭지 않다는 소문입니다.”

소식을 전하는 군사의 말투는 다급했으나, 장량이 돌아온 뒤의 잇따른 승리에 우쭐해있던 패공은 별 생각 없이 그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마앙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쪽에서 먼저 낙양으로 밀고 드는 게 어떻소? 적이 힘을 모으기 전에 들이치면 지금의 우리 군사만으로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오. 그래서 낙양성만 떨어뜨리면 거기서부터 함곡관까지는 힘들이지 않고 갈 수도 있소.”

번쾌와 주발을 비롯한 장수들도 모두 그같은 패공의 말을 반겼다. 이리저리 전장을 옮겨다니며 지리하게 싸우는 것보다 곧장 함양으로 쳐들어가 결판을 내는 쪽이 단순하고 간명한 것을 좋아하는 그들의 마음에 더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이 때문일까, 공을 서두는 경향이 있는 역이기도 그런 장수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장량만은 달랐다. 홀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함곡관은 진나라의 대문 같은 곳이라 그 전면에는 진의 군세가 아직 두텁게 깔려 있을 것입니다. 용케 낙양성을 떨어뜨린다 해도 우리 군사만으로는 함곡관을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한나라의 남은 성읍(城邑)을 더 차지하여 군사를 늘이고 물자를 쌓은 뒤에 천천히 서쪽으로 길을 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패공은 잠시 주춤했으나 워낙 세상일을 좋게만 보는 데다 느긋하게 타고난 성품이었다. 게다가 이미 뱉은 말도 있어 전에 없던 고집을 부렸다.

“그렇지만 뜻 아니한 때에 치고 들어 길고 짧은 것을 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오. 자방 선생. 그냥 한번 밀고 나가 봅시다.”

그러면서 장량에게 희미한 웃음을 보냈다. 무책임해 보이지만 그래도 그 임자가 뜻하는 바를 쉽게 거역하지 못하게 하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거기다가 다시 만난 뒤로 스무날이 되도록 한번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던 패공이라 장량도 굳이 제 뜻만을 우길 수는 없었다. 이에 논의는 오래가지 않아 끝나고 패공의 군사는 낙양으로 가게 되었다.

패공은 적군에게 집중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밤길을 재촉해 군사를 휘몰았다. 그런데 아직 낙양성이 보이지도 않은 동쪽 벌판에 이르렀을 때였다. 희붐한 새벽안개 속에서 솟아나듯 한 떼의 인마가 뛰쳐나와 패공의 군사를 덮쳐왔다. 그리 대군은 아니었으나 패공의 전군을 어지럽히기에는 넉넉한 머릿수요, 기세였다.

승세를 타고 마음이 풀어져 있던 패공의 군사들은 그 뜻 아니한 급습을 버텨내지 못했다. 제대로 맞받아 쳐보지도 못하고 선두가 뭉그러지자 그 뒤는 싸워보지도 않고 돌아서서 달아났다. 관영과 주발이 후군(後軍)을 이끌고 맹렬히 맞서주지 않았더라면 크게 낭패를 당할 뻔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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