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골짜기를 빠져나가면 바로 패상에 이르고, 패상에서 함양까지는 날랜 보졸(步卒)이 걸어 하룻길이 안 됩니다. 그런데 패상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이곳에 왔으니, 함양성 밖에서의 싸움은 이 싸움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모질게 죽이고 내몰아 저들에게 우리 군사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쫓겨 간 저들의 입을 통해 함양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겁을 먹게 될 것입니다.”
환원산(환轅山)에서 다시 만난 이래 꾀주머니[지낭]처럼 써오던 장량의 말이 그러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패공 유방이 못 본 척 한쪽으로 비켜서자 초나라 장졸들은 한층 맹렬하게 진군(秦軍)을 두들겼다.
초나라 군사보다 적지 않은 머릿수에, 제자리에 앉아서 먼 길을 온 적을 막는다는 이점만 믿고 정면으로 맞섰던 진군은 오래잖아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태반이 무기를 내던지고 항복하고 나머지는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남전 골짜기[藍田谷]로 빠져나가 패상(覇上)으로 달아났다.
장량이 다시 패공에게 와 가만히 일러주었다.
“적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말고 바로 뒤쫓게 해야 합니다. 패상 수장(守將)이 대군을 몽땅 끌고 이리로 오는 바람에 패상 성안은 비어 있을 것입니다. 적에게 패군(敗軍)을 수습할 틈을 주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패공이 아니었다. 다시 장검을 뽑아들고 말배를 박차며 큰소리로 장졸들에게 외쳤다.
“들어라. 후군(後軍) 한 갈래만 남아 항복하는 적병을 거두고, 나머지는 모두 달아나는 적병을 바짝 뒤쫓아라! 이대로 패상까지 밀어붙여 오늘밤은 패상 성안에서 쉬도록 하자!”
그리고는 대군을 몰아 남전 골짜기로 적병을 뒤쫓았다. 뒤쫓다 보니 골짜기를 흐르는 개울은 점차 굵어져 냇물이 되었다. 이윽고 골짜기가 끝나자 괴이한 형상의 진흙 언덕을 가진 황무지가 펼쳐지고 따라오던 냇물은 어느새 배를 타고 건너야할 작은 강물이 되었다.
“이 불모(不毛)한 땅이 흰 사슴이 내닫는 형상으로 보이는지 사람들은 이곳을 백록원(白鹿原)이라고 부릅니다. 물은 여기서부터 패수(覇水)가 됩니다.”
장량이 패공을 뒤따라오며 일러주었다.
다시 한참을 뒤쫓으니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지 않는 거친 들판이 끝나면서 농경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진군은 장졸(將卒)과 보기(步騎)가 한 덩어리가 되어 바람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그 들판을 뒤덮으며 달아났다. 저만치 벌판 북쪽으로 제법 큰 성 하나가 희미한 그림자처럼 솟아올랐다.
“패상입니다. 성안에 남아 있던 군사가 있어 저희 편을 구한답시고 맞받아 쳐올지 모르니 여기서 잠시 전열(戰列)을 정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눈길을 모아 앞을 살피던 장량이 그렇게 말했다. 한나절 가까이 쉬지 않고 내달은 셈이라 패공도 어지간히 지쳐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고삐를 당겼다. 그때 그림자처럼 패공을 따르던 노관이 한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글 이문열 그림 박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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