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의 잔치 때만 해도 항우의 사람이었으나 나중에 한(漢)나라 승상이 되어 <사기(사기)> 세가(世家)편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진평(陳平)은 양무현(陽武縣) 호유향(戶유鄕) 사람이다.
일찍 부모를 잃고 형 진백(陳伯)과 함께 물려받은 땅 36무(畝)에 의지해 살았다.
살림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으나 진평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고, 형 진백은 그런 아우를 잘 뒷받침했다. 자신은 농투성이로 살면서도 진평은 살림걱정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덕분에 진평은 자란 뒤 멀리 다른 지방까지 가서 스승을 구하고 벗을 사귈 수 있었다.
진백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심성이 그리 곱지 못했다. 다 자란 시동생이 글줄이나 한답시고 농사일을 거들어주기는커녕 집안조차 제대로 돌보지 않자 심사가 틀어졌다. 이웃을 만나기만 하면 입을 비쭉거리며 시동생을 흉보았다.
“우리는 아무래도 쌀겨나 먹고 살아야할 팔자인가 봐. 시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저렇게 빈둥거리기만 하니, 우리 내외 아무리 고단하게 땅을 파본들 뭘 해? 저런 시동생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해!”
그러다가 어느 날 진백이 그 소리를 들었다. 진백은 아우에게는 못마땅해 하는 내색 한번 않고 아내만 집안에서 내쫓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다른 말도 있다. 진평은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좋아 사람들은 가끔씩 농담 삼아 그에게 묻곤 하였다.
“자네는 집도 가난한데 무얼 먹고 그렇게 크고 살찌게 되었는가?”
거기다가 인물까지 훤해 마을 여자들이 좋아하였는데 형수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진평에게 은근한 추파를 보내었으나 진평이 차갑게 뿌리치자 앙심을 먹고 그를 헐뜯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일을 두고 진평을 미워하는 이들은 진평이 형수와 사통(私通)한 것인데, 사람 좋은 진백이 제 아내만 내쫓았다는 말을 퍼뜨리기도 했다.
진평이 나이 들어 장가들 때가 되었으나 쉽게 장가를 들 수가 없었다. 부잣집에서는 가난한 그에게 딸을 주려고 하지 않았고, 가난한 집에 장가드는 것은 그 자신이 구차스럽게 여겨 마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호유향에 장부(張負)라는 부자가 살았다. 장부에게는 곱고 사랑스런 손녀가 하나 있었는데, 다섯 번이나 시집을 갔지만 그때마다 남편이 이내 죽어버려 그 뒤로는 아무도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진평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
그 무렵 진평이 사는 마을에 초상을 당한 집이 있었다. 집안이 가난한 진평은 부조를 대신하여 상가 일을 도왔는데, 남들보다 일찍 가서 늦게 돌아오는 것으로 상가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장부가 그 상가에 왔다가 진평의 뛰어난 풍채에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래서 일부러 상가에 남아 진평의 행실을 가만히 살폈다. 진평도 장부가 자신을 살피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욱 정성으로 상가 일을 보다가 그날도 조객(弔客)들 중에서 가장 늦게 상가를 떠났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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