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65>卷四.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5월 30일 17시 20분


갓 쓴 원숭이(1)

홍문의 잔치가 있고 며칠 뒤 항우는 드디어 군사를 몰아 함양으로 들어갔다. 이미 두 달 전에 패공에게 항복한 적이 있는 함양은 한번 짓밟힌 여인처럼 아무 저항 없이 항우를 받아들였다. 이세 황제가 마지막으로 기거하던 망이궁(望夷宮)에 자리 잡자 항우에게도 나름의 감회가 있었다.

일찍이 항우는 시황제가 회계산(會稽山)을 유람하고 절강(浙江)을 건너는 광경을 보고 소리친 적이 있었다.

“대단하구나! 하지만 저 자리를 내가 빼앗아 대신할 수도 있으리라[피가취이대야].”

그때 숙부는 얼굴이 퍼렇게 질려 항우를 꾸짖었지만 항우로서는 솔직한 심경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항우는 그 시황제의 도성을 차지하고. 시황제가 기거하던 대궐에 자리를 잡아 진나라를 굽어보게 되었다.

비록 항우 자신이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것은 아니지만, 이제 천하는 그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나라나 그 땅의 사람들에게 이긴 자의 너그러움이나 천하를 얻은 자의 어진 다스림을 베풀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항우에게 그런 걸 바라기는 무리였다. 진나라의 주력(主力) 군사들과 싸우면서 악전고투를 거듭해오는 동안에 거칠어지고 뒤틀린 정서는 처음부터 관용이나 연민과는 멀었다.

항우는 항복한 진나라의 마지막 임금 자영(子영)부터 끌어내 죽이는 것을 함양에 들어온 뒤의 첫 일로 삼았다. 유방의 배려로 목숨을 건진 자영은 그 무렵 옥리(獄吏)의 감시를 받으며 망이궁의 한 전각에 유폐되어 있었다. 자영이 끌려오자 항우가 소리높이 꾸짖었다.

“진나라는 백성을 형벌로 학대하고, 세금과 부역으로 쥐어짰으며, 남의 나라를 삼키려는 싸움터로 내몰아 그 목숨을 무수히 잃게 하였다. 또 육국(六國)을 병탄하고 천하를 아우른 뒤에는 천하 만민을 끌어다가 제 백성을 학대하고 쥐어짜듯 하였으며, 제 아비 할아비의 나라를 되 일으키려 한다는 죄목으로 수많은 관동(關東)의 의사(義士)들을 도륙하였다. 네 그런 진나라의 왕으로서 천하에 지은 죄를 알겠느냐?”

겉으로는 그렇게 자영의 죄를 따졌으나 자영이 항우에게 지은 죄는 따로 있었다. 한 나라의 군왕(君王)답게 싸우다가 비장하게 죽지 못하고 항복을 한 죄, 그것도 패공 유방처럼 별 힘도 없는 허풍선이에게 덥석 나라를 내어준 죄였다. 거기다가 꼼짝없이 자영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그동안의 마음 졸임으로 초췌해진 모습과 항우에게 목숨을 빌어 나약과 비굴을 한 번 더 내보인 일이었다.

“임금은 곧 나라이다. 진나라가 이미 망했는데 진나라의 임금 되어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 구차하게 목숨을 빌어 서북의 강국 진나라의 천년 사직을 욕되게 하지 말라!”

그러면서 진왕 자영을 죽인 항우는 다시 진나라 왕실의 여러 공자(公子)들을 잡아들였다. 그들에게도 이런 저런 죄목을 씌웠으나, 실상 그들을 죽인 까닭도 겉으로 밝힌 죄목과는 달랐다. 진승과 오광의 기의(起義) 이래 육국의 복국(複國)과정에서 잘 보아왔듯, 그들도 나중에 진나라 회복을 구실로 자신에게 저항하는 세력의 중심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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