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66>卷四. 흙먼지 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5월 31일 18시 46분


갓 쓴 원숭이(2)

그 다음으로 항우가 끌어내 죽인 것은 높고 낮은 진나라의 벼슬아치들이었다. 역시 겉으로는 포악한 임금을 도와 못된 짓을 한 죄[조걸위악]를 묻고 있었지만 그 또한 겉과 속이 다르기는 앞서와 다름없었다. 항우의 장수들에게 사감(私憾)을 산 적이 있거나, 뇌물을 바쳐 구명(救命)을 빌지 않은 진나라의 벼슬아치들은 그 직위가 높고 낮고를 가리지 않고 성하지 못했다. 마치 진나라 왕이라도 된 양, 항우는 관중의 성곽과 관애(關隘)를 지키는 데 소홀했던 장수들도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함양으로 들어간 항우가 저지른 잘못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신이 거느린 장졸들에게 약탈을 허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시황제나 다름없이 백성을 쥐어짜고 함부로 죽이게 된 일이었다. 약탈을 허용하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일종의 포상으로 유방도 부분적으로는 약탈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부호들이나 관청의 부고(府庫)에 제한되어 있어 백성들을 해치지는 않았는데, 항우의 장졸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약탈하고, 빼앗기기를 마다하거나 대들면 거침없이 죽였다.

항우의 장졸들이 그렇게 마구잡이로 백성들을 약탈하게 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관청의 부고나 궁궐의 창름(倉(늠,름))에 들어있는 재화와 보물은 항우 자신이 모두 거두어들인 탓이었다. 항우는 특별히 물욕이 많은 것이 아니면서도 남이 보면 인색하게 보일 만큼 재물에 집착했다. 지난 두어 해 먹을 것을 찾아 모이고 흩어지는 유민군(流民軍)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거느리게 되면서 터득한 요령 때문이었다. 그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제 사람으로 부리기 위해서는 재물이 필요했고, 그래서 재물은 그 어떤 것에 못지않게 날카로운 병기며 빼어난 전략이 될 수도 있었다.

유별난 자부심에서 비롯된 독점욕도 재물에 대한 항우의 이해 못할 집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천하의 모든 것은 이긴 자, 가장 뛰어나고 힘 있는 자의 것이어야 한다―그런 의식이 값지고 귀한 것은 모두 자신의 차지여야 한다는 믿음을 항우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전리(戰利)의 중요한 품목이었던 여자에게도 적용되었다.

항우는 재화와 보물뿐만 아니라 궁궐 안의 여자들까지도 모두 거두어들이게 했다. 장졸들에게 나누어줄 것은 나누어주고 놓아줄 것은 놓아주며 곁에 두고 부릴 것은 부릴 것대로 골라두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궁궐 안의 여자들을 모두 모아들이는 가운데 부장(部將) 하나가 한 무리의 젊은 여자들을 데려와 별난 소리를 했다.

“궁궐 동북쪽의 한 전각에서 이들을 데려왔는데, 저기 나이든 것들은 궁녀임에 틀림없으나, 여기 이 젊은 것들은 어떻게 나누어야할지 난감합니다. 궁녀로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비복(婢僕)으로 볼 수도 없고….”

“그게 무슨 소리냐?”

“원래 이것들은 조고가 호해(胡亥)에게 아첨하기 위해 전국 각처에서 끌어 모은 미인들이라 합니다. 궁궐의 예법에다 가무(歌舞)나 시문(詩文) 같은 것을 익히게 한 뒤에 궁녀로 삼으려 했는데, 조고와 호해 사이가 먼저 틀어져 서로 죽이고 죽는 통에 그대로 되지 못한 듯합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전각 한쪽으로 밀려나 천하의 새 주인이 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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