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67>卷四.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1일 18시 32분


갓 쓴 원숭이(3)

“새 주인이라면 자영(子영)도 있지 않았느냐?”

아무도 손대지 않은 미인들이란 말에 항우가 그렇게 물었다.

“자영은 삼세 황제가 아니라 오직 진왕(秦王)이 되었을 뿐이었고, 그나마 달포밖에 임금노릇을 하지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또 자영은 간악한 조고를 죽이느라 온 힘을 다 쏟는 바람에 저 미인들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패공도 이 궁궐에 든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러면서 무심코 끌려온 여인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항우는 갑자기 움찔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군데 몰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듯한 여남은 명의 소녀들 사이에서 반짝 쏘아져 나온 한줄기 눈빛 때문이었다. 짧게 얼굴을 스쳐갔으나 항우에게는 마치 수십개의 날카로운 창날이 가슴을 찔러오는 것 같았다.

항우는 놀라 그 눈빛의 임자를 살펴보았다. 항우의 눈길이 그 임자의 얼굴에 이르자 이번에는 가슴이 철렁하고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제 열여섯이나 되었을까, 얼른 보면 설익은 듯한 싱싱함과 풋풋함이 있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애처롭게 느껴지는 그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단옷에 싸인 그녀의 자태를 바라보는 항우의 느낌은 또 달랐다. 가늘면서도 풍만하여 나이답지 않은 성숙을 드러내는 그 몸매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찌르르한 이끌림을 느끼게 하는 요염함과 고혹이 깃들어 있었다. 까닭 모르게 사람을 후끈 달게 하는 것으로는 항우의 경험에도 더러 있는 느낌이었다.

“자영이 항복한 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이들을 거두어 이때까지 보살피게 한 사람이 바로 패공이라고 합니다.”

부장(部將)이 좀 전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지만 항우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 어떤 운명의 끌림이었을까, 그때 소녀도 말끄러미 항우를 올려보았다. 몇 달 왕궁에서 단련을 받기는 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여염의 딸에 지나지 않았던 소녀였다. 그런데 천하를 떨게 하는 대장군 항우의 화경(火鏡) 같은 눈길을 한번 움찔하는 법조차 없이 마주 받고 서 있었다. 오히려 마비된 듯 한참이나 굳어있던 것은 항우였다.

“저 아이는 누구냐? 어디서 왔으며…누구의 자식이냐?”

이윽고 정신을 가다듬은 항우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부장이 늙은 궁녀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항우의 물음을 전했다. 늙은 궁녀가 자주 겪은 일인 듯 나서서 대답을 대신했다.

“음릉(陰陵)땅 우자기(虞子期)의 딸이라 들었습니다.”

“음릉이라, 우자기의 딸이라….”

그렇게 되뇐 항우는 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헤아려 보면 그때 항우의 나이 스물일곱, 여느 사내라도 한창 여자를 밝힐 혈기 왕성한 때였다. 더구나 용맹과 기력이 남다른 장군으로 마침내 진나라를 꺾어 천하에 두려울 게 없는 항우이고 보면 그때까지 처자를 거느리지 않은 게 유별날 수도 있었다. 다른 제후들이나 유민군(流民軍) 장수들은 웬만한 터전만 마련하면 보란 듯 처첩을 거느렸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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