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69>卷四.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3일 18시 36분


갓 쓴 원숭이(5)

“거록(鉅鹿)에서 왕리(王離)를 사로잡고 은허(殷墟)에서 장함의 항복을 받았을 때 이미 천하대세는 결정된 것입니다. 그 뒤 함곡관을 넘어 진나라의 남은 세력을 쓸어내고 이제는 함양까지 차지했는데 대왕 말고 천하의 주인이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 게다가 대왕께서 저들을 모두 거두실 수 없다면 여러 장수들도 있지 않습니까? 저 중에서 한둘만 취하시고 나머지는 그들에게 비첩(婢妾)으로 나누어 주신다면 그들은 더욱 대왕의 우악스러운 은혜에 감격할 것입니다.”

진평이 다시 한번 그렇게 권하자 항우도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가다듬어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헤아렸다.

‘저 아이는 바로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며 만나기를 기다려 온 그 아이다. 그리고 이 자리는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자리다. 여기까지 와서 내가 구태여 저 아이를 마다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무엇을 더 참고 무엇을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나도 나이 스물일곱의 사내, 더구나 지난 3년 주검의 언덕을 넘고 피의 내를 건너 여기까지 왔다. 한 여인을 거느린다 해서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이제 저 아이를 내 여자로 거두겠다.’

이윽고 그렇게 마음을 정한 항우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억지로 감추며 못이긴 척 말했다.

“경(卿)의 말도 반드시 그른 것 같지만은 않구나. 좋다. 저 아이들을 거두어 우씨 성 쓰는 아이만 내 군막에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공 있는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렇게 우희(虞姬)를 거두어들인 항우는 처음 그녀를 받아들일 마음을 먹을 때와는 달리 갑자기 급해져 그날 밤으로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

항우가 다시 패공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날 밤 작은 잔치로 맞아들인 우희와 한차례 정을 나눈 뒤였다. 흡족함을 넘어 감격에 가까운 기분으로 우희를 뜯어보던 항우가 불쑥 물었다.

“내 들으니 패공이 먼저 너희들을 거두어 보살피게 했다고 하는데 별일은 없었느냐? 특히 너를 보고는 어찌하더냐?”

“대왕처럼 한동안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시다가 이름을 물었을 뿐입니다.”

우희가 별 감정 없는 목소리로 가만가만 대답했다. 항우가 까닭모를 질투를 느끼며 캐묻듯 물었다.

“그것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패공이란 자는 강동에 있을 때부터 호색하기로 이름이 난 자다. 싸움터에서도 냄새나는 농가의 아낙이나 갈 곳 없는 유민의 딸들을 둘씩 셋씩 끼고 잔다고 들었는데, 너를 보고도 그냥 두었다니….”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저희는 그날 낮에 한번 그분을 뵌 뒤로는 두 번 다시 뵙지 못하였습니다.”

우희가 여전히 별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게 항우의 심사를 건드려 이번에는 우희에게 의심쩍어하는 눈빛을 보이며 물었다.

“그가 너를 바라볼 때 네 느낌은 어땠느냐?”

“장수라기보다는 그냥 부드럽고 너그러운 어르신 같았습니다.”

그래도 우희는 담담하기만 했다. 그게 항우를 더욱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완연히 비틀린 말투로 이죽거렸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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