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72>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7일 18시 44분


갓 쓴 원숭이(8)

“여기서 동쪽으로 십리쯤 되는 곳 땅속에 시황제의 대군이 숨어 있습니다. 관동(關東)에서 군사들이 쳐들어오면 막기 위해 시황제 생전부터 감춰둔 대군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항우의 장수 하나가 의심쩍은 눈길로 다그쳐 물었다.

“시황제의 대군이라니? 진나라에 아직 대군이 남았다면,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음을 당했는데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네놈이 헛것을 본 모양이로구나.”

“아닙니다. 수천수만의 인마가 땅속에 줄지어 선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농부가 억울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사람과 말이 줄지어선 형태를 그려보이 듯 일러주었다. 항우의 장수가 들어보니 진나라 군사들의 행군법(行軍法) 그대로였다. 그제야 농부를 무턱대고 의심할 수만은 없게 된 그 장수가 다시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들은 말을 전했다.

진나라의 대군이란 말 때문인지 이번에는 항우가 직접 달려왔다. 싸움다운 싸움조차 없이 패공에게 항복해 버린 진나라의 무력함을 의심쩍게 여겨온 항우로서는 드디어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는 기대까지 품었다.

그 농부는 항우를 여산 동쪽의 황량한 벌판으로 데려갔다. 한때는 적잖은 군사가 진채를 벌인 흔적이 있는 곳이었는데, 그 한편에는 아직도 쓰임을 알 수 없는 움막들이 텅 빈 채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사람의 자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달포 전만 해도 군사들이 깔려 잡인의 출입을 엄하게 막았는데….”

그 농부도 아무도 없는 것이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기웃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항우 곁에 섰던 낭중(郎中) 하나가 두 눈을 부라리며 농부를 몰아세웠다.

“영감, 바로 말해. 공연히 거짓말로 상금이나 우려내려다가 목이 날아가는 수가 있어!”

“아닙니다. 틀림없이 몇 년째나 이곳에는 많은 군사와 인부들이 움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달포전만 해도 저쪽에는 골짜기 같이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고, 그 안에는 기마를 앞세운 보갑(步甲)과 궁수(弓手)들이 수천명이나 넉 줄로 늘어 서 있었는데….”

그러면서 농부가 가리킨 곳은 풀 한포기 안 난 넓은 평지였다.

“그곳에는 골짜기도 구덩이도 없지 않나? 그리고 진나라 군사들이 잡인의 출입을 엄하게 막았다면서, 그건 어떻게 보았나?”

“저쪽 언덕에 숨어서 보았습니다. 무리를 벗어난 가축을 찾다가…. 먼빛으로 보았지만 틀림없어요. 한창 때의 우리 진나라 군병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군이었습니다.”

농부가 그 말과 함께 연방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억울하다는 듯 그 평지 쪽으로 우르르 달려가 이곳저곳을 뜯어보듯 살폈다. 항우도 그 일대에 가득한 이상한 살기(殺氣) 같은 것을 느끼며 가만히 주변을 살폈다. 도무지 군사를 매복시킬 데가 없는 평지인데도 왠지 대군이 숨어있는 골짜기를 지나는 느낌이었다.

그때 펄쩍펄쩍 뛰며 땅을 굴러보기도 하고, 땅바닥에 귀를 대고 뭔가를 엿듣기도 하던 그 농부가 갑자기 자신을 몰아대던 낭중을 보고 소리쳤다.

“여깁니다. 틀림없이 이쯤 돼요. 군사들을 시켜 여기를 파 보십쇼!”

“괭이와 삽가래를 가져와 어서 저것을 파보아라.”

그 낭중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항우가 나서 군사들에게 농부의 말을 따르게 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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