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73>卷四.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8일 18시 24분


갓 쓴 원숭이(9)

오래잖아 괭이와 삽을 든 군사들이 와서 농부가 가리킨 곳을 파기 시작했다. 겨우 한 자나 팠을까, 정말로 괭이 끝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흙이나 모래를 파헤칠 때 나는 소리가 아니라, 비어 있는 나무상자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이 아래 뭔가 있다. 어서 흙을 걷어내 보아라.”

항우가 그렇게 군사들을 재촉했다. 군사들이 서둘러 흙을 걷어내고 보니 바닥에는 두꺼운 널판이 마룻바닥처럼 깔려 있었다. 창대로 두드리자 쿵쿵 울리는 것으로 보아 그 아래가 비어 있는 듯했다.

“흙을 더 걷어내고 널판을 들춰보아라. 정말로 진나라 대군이 숨어 있는 땅굴 입구인지도 모르겠다.”

항우가 다시 그렇게 소리쳤다. 더 많은 군사들이 거들어 흙을 걷어내자 여덟 자 남짓의 두꺼운 널판으로 짜여진 평상 같은 것이 나왔다. 군사들이 여럿 힘을 합쳐 그것을 들치자 한눈에 땅굴 입구임을 알아볼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가 입을 벌렸다. 아래로 비스듬하게 길이 나 있는 걸로 보아 땅굴은 꽤나 깊은 곳에 나 있는 듯했다.

항우가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장검을 움켜잡고 앞장서 뛰어내리려 했다. 그러자 부장(部將) 하나가 그런 항우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대왕, 자중하십시오. 이곳은 어둡고 비좁아 암습(暗襲)이라도 당하면 대왕의 용력으로도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제가 한번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훌쩍 날려 땅굴 입구로 내려서다 말고 군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안이 어두울 듯싶으니 너희 중 둘만 홰를 마련하여 나를 따르라!”

가까이 있던 군사 둘이 한참이나 부산을 떨어 횃불 몇 개를 마련하고는 그 부장 곁에 붙어 섰다. 왼손으로는 횃불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칼을 빼든 부장이 군사들과 함께 한발 한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억!”

갑자기 땅굴 안쪽에서 놀라 지르는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앞선 부장이 낸 소리 같았다. 곧 그를 따르던 군사들의 목소리가 두서없이 뒤를 이었다.

“저, 저게 뭐야?”

“살아 있는 거야? 죽은 거야?”

궁금해진 항우가 땅굴 속을 들여다보며 큰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 안에 무엇이 있느냐?”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은 부장이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의 대군입니다. 흉갑(胸甲)을 갖춰 입고 항오(行伍)를 이룬 보졸들인데 선두에는 기마와 수레까지 갖췄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군사들 같지는 않습니다.”

“살아 있지 않다?”

항우가 그렇게 되뇌며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횃불 든 병사 몇이 다시 항우를 호위하듯 따라나섰다. 땅바닥에서 한 길도 내려가기 전에 횃불이 아니면 한 치 앞도 보기 어려울 만큼 사방이 어두워졌다.

글 이문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