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74>卷四.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9일 18시 24분


갓 쓴 원숭이(10)

땅굴 입구는 서너 길 아래서부터 시작되었다. 군사들이 든 횃불로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던 항우는 갑자기 섬뜩한 느낌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이 지금껏 싸워온 어떤 부대보다 더 정예한 진군의 밀집(密集)부대가 수레와 기마병을 앞세우고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토용(土俑) 같습니다. 진흙으로 구워 만든 군사 말입니다.”

항우가 멈칫하는 것을 보고 먼저 가서 살피고 있던 부장이 소리쳤다.

그 소리에 다소 긴장이 풀린 항우가 차분히 살펴보니 정말로 땅굴 안에 줄지어 서 있는 것은 살아있는 군사들이 아니었다. 사람 크기로 빚은 진흙을 구워 만든 군사들인데, 각기 생김이 다른데다 쥐고 있는 병장기나 맡은 일에 따른 자세가 또 각각이었다. 거기에다 방패나 갑주, 의복에는 채색까지 되어 있어 모두가 꼭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말들도 수레를 끄는 것이건, 기병이 타는 것이건 사람과 다름없이 모두 살아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 까닭을 모르게 항우의 전의(戰意)를 자극했던 살기는 그런 토용들로부터 뿜어져 나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모두 가까이 오라. 와서 좀더 안쪽 깊이 횃불을 비춰 보아라.”

항우가 줄지어 선 병마용(兵馬俑) 앞으로 다가가며 횃불 든 군사들을 불렀다. 그러자 횃불 대여섯 개가 일시에 항우 쪽으로 몰렸다. 하지만 촘촘히 세운 나무기둥 위로 두꺼운 널판을 얹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땅굴은 폭이 별로 넓지 않아 불빛이 그리 멀리 비치지 못했다. 거기에다 땅굴은 안으로 길게 뻗어 있어, 보는 사람에게는 어깨를 겯듯 넉 줄로 늘어선 보갑(步甲)부대가 그 깊이 모를 어둠 속에서 끝없이 밀려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그 엄청난 토용 군단에 압도됐던 항우가 다시 평소의 투지와 패기를 되살렸다.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앞선 기마 장수의 허리를 베었다. 그리 높은 온도로 구운 것이 아니었던지 그윽,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을 타고 있던 토용이 두 토막 나 말에서 떨어졌다. 항우는 다시 그 뒤에 창과 방패를 들고 선 병사의 토용을 후려쳤다. 이번에는 그 목이 쑥 뽑히듯 날아갔다. 사람의 형상을 한꺼번에 빚은 것이 아니라 머리와 몸통, 아랫도리 따위 몇몇 부분을 따로따로 만들어 구운 뒤에 끼워 맞춘 듯했다.

항우는 그 뒤로도 몇 개의 토용을 더 부수어 본 뒤에야 땅굴을 나왔다. 다른 곳에 있던 범증과 계포가 때마침 그곳에 이른 걸 보고 항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부(亞父)와 계포 장군은 어서 들어가 보고 저게 무엇인지를 살펴보시오. 시황제 생전부터 있었던 모양인데,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소.”

그 말에 이번에는 범증과 계포가 항우를 대신해 땅굴로 내려가 안을 살펴보았다. 이윽고 입구로 되돌아 나온 계포가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는 필시 불로초니 신선이니 하며 허황된 것들을 믿던 시황제가 죽은 뒤를 위해 땅속에 마련해둔 토용군단입니다. 진나라에 있었던 순장(殉葬)의 습속이 폐지되어 죽은 뒤에 부릴 군사를 데려갈 수 없게 되자 토용으로 갈음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능묘 속에 세우지 않고 하필이면 이곳이오?”

항우가 얼른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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