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91>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29일 18시 14분


맞바람(2)

“또 홍문(鴻門)에 돌아와서는 내가 동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리는 한생(韓生)을 삶아 죽이고, 끝내 아부(亞父)의 말을 듣지 않고 유방을 살려 한왕(漢王)에 봉했으며, 이제는 동쪽에 치우쳐 있는 내 도읍 팽성으로 떠나려 하고 있다. 오추마가 드디어 먹기를 그만두고 마침내 숨이 끊어진 것은 내가 홍문에 와서 한 이 같은 짓들로 내 패업도 끝장났다고 보아 스스로 나를 떠난 것이겠구나. 하늘이 그리하라고 시킨 것이로구나.”

패왕이 한층 살기를 드러내며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무섭게 그 구장(廐將)을 쏘아보았다. 그제야 놀란 구장이 후들후들 떨며 더듬거렸다.

“아닙니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제란 하늘에서는 귀신의 우두머리(鬼神之首)요, 땅에서는 임금 중의 임금(王中之王)이라고 들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장차 황제가 되시어 천하를 다스리실 분이신데, 아무리 하늘인들 대왕께서 하신 일을 감히 어떻게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오추마가 먹지 못하게 된 것은 물과 땅이 맞지 않고(水土不服),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힘든 싸움에 지쳐 그리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급하게 둘러댄 말이었지만 그래도 패왕의 자부심과 허영에 호소하는 데는 효험이 컸다. 여러 해 가까이서 패왕을 모시면서 그 성품을 익히 알게 된 덕분이었다. 패왕이 조금 살기를 누그러뜨리며 다짐받듯 물었다.

“네 정녕 솥에 삶기기 싫어 둘러대는 말은 아니렷다?”

“그렇습니다. 오중에서 대왕을 따라나선 이래 한 번도 대왕께서 받으신 천명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패왕이 깊숙한 한숨과 함께 얼굴에서 살기를 걷어내며 엄중하게 말했다.

“그렇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내려온 천마 같은 것이 어디 있겠느냐? 사람의 공력과 정성이 곧 하늘의 뜻이다. 너는 지금 가서 함양 궁궐에서 끌어온 말 중에 힘 좋고도 날랜 검은 털 섞인 부루 말(오추마·烏추馬) 한 마리를 골라 보아라. 그리고 낯모르는 농부를 시켜 하늘이 죽은 오추마를 대신해 보낸 말이라고 하며 내게 끌어다 바치게 하라. 이제부터 그 오추마가 이 서초패왕의 대업을 돕기 위해 하늘이 보낸 천마(天馬)이다!”

진승과 오광이 여우를 가장하거나 물고기 배를 빌려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하늘의 뜻을 조작했던 것처럼 패왕에게도 자기현시(自己顯示)를 넘어서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

패왕이 대군과 함께 팽성에 이른 것은 여름 5월 중순이었다. 그동안 쌓인 전리(戰利)로 말이나 갑옷투구를 치장한 8천 강동의 자제들은 겉모습만으로도 눈부신 승리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을 앞세우고 행군하는 서초(西楚) 30만 대군의 위세는 천지를 떨어 울리게 했다.

패왕 항우는 흰 비단 전포에 금은으로 장식한 갑주를 걸치고 새로 얻은 오추마 위에 높이 앉아 있었다. 시황제처럼 여러 대의 온량거(온량車)를 늘어세우지도 않았고, 앞뒤로 창칼을 번쩍이며 따르는 갑사(甲士)들과 번다한 기치도 없었으나 그 위엄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절로 떨리게 했다. 실로 그보다 더할 나위가 없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거기다가 팽성 사람들을 더욱 감탄시킨 것은 그 행렬을 뒤따르는 수레들이었다. 수레마다 함양에서 약탈한 재보로 가득했고, 그 마지막 비단 휘장을 드리운 수레에는 우미인(虞美人)이 타고 있었다. 부로(부虜) 삼아 함양에서 끌고 온 부녀(婦女)들도 눈길을 끌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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