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01>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7월 11일 18시 25분


맞바람(12)

“항우는 천하를 다룸에 있어 공평하지 못하여 자신을 따른 여러 장수들은 모두 좋은 땅에 왕으로 봉해주고, 이전의 왕들은 모두 나쁜 땅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우리 조왕(趙王)께서는 기름진 조나라를 내주고 궁벽한 대(代) 땅으로 쫓겨나시고 말았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 신(臣)에게 군사를 빌려주신다면 우리 조왕께 옛 땅을 찾아드릴 뿐만 아니라, 신이 봉지로 받은 남피(南皮)의 땅을 들어 대왕의 나라를 막고 지키는 울타리가 되게 하겠습니다.”

그런 진여(陳餘)의 말은 곧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를 칠 군사를 빌려 달라는 뜻이었다. 제나라 왕 전영에게는 결코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이에 전영은 오히려 기뻐하며 군사 한 갈래를 떼어 진여에게 보냈다.

전영이 보낸 군사가 남피로 오는 동안 진여도 식읍으로 받은 하간(河間)의 세 현(縣)을 쥐어짜듯 하여 군사를 모았다. 그러자 산동에 이어 하간, 하북(河北)에 이르기까지 패왕에게 맞서는 군사들의 움직임으로 술렁거렸다. 거기다가 한나라 땅으로 돌아가 있던 장량이 다시 글을 보내 알려왔다.

“제나라가 이제는 조나라까지 부추겨 대왕께 맞서려 합니다.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서초(西楚)를 쳐 없애고 의제께 천하를 돌려준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소공 각이 팽월에게 형편없이 당하고 쫓겨 오면서 벌겋게 달아있던 패왕은 그 말을 듣자 더 참지 못했다. 당장 대군을 일으켜 제나라를 짓밟아 버리겠다며 길길이 뛰었다. 하지만 나라 안팎의 사정이 그렇지가 못했다. 파촉 한중에 가둔다고 가뒀지만 한왕(漢王) 유방의 위협이 다 가시지는 않은 데다, 의제(義帝)는 회왕(懷王) 시절부터의 조신(朝臣)들과 옛 초나라 귀족 떨거지들에 둘러싸여 팽성에 남아 있었다.

“한(韓)나라는 한중(漢中)과 땅이 이어져 있고, 무관(武關)은 중원으로 들어오는 요긴한 길목이다. 그런데 한왕(韓王) 성(成)은 진나라를 쳐 없애는 데 세운 공이 적을 뿐만 아니라, 무관에 걸터앉아 서쪽에서 밀고 드는 도적 떼를 막아낼 장재(將材)도 없다. 따로 마땅한 장수를 골라 한나라를 맡길 것이니, 한왕 성은 열후(列侯)로서 이대로 팽성에 머물도록 하라.”

패왕은 먼저 그렇게 하여 한나라가 한왕 유방에게 길을 열어주는 걱정부터 덜었다. 그리고 다시 의제에게도 사람을 보내 진작부터 정해놓은 대로 통보하게 하였다.

“옛부터 천자의 영토는 사방 천리로서 그 도읍은 반드시 물의 상류에 있었습니다. 이제 널리 살펴보니 장사(長沙) 침현(*縣)이 바로 그러한 땅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장사군 천리를 근기(近畿)로 삼으시고 침현에 도읍하시어 천하를 굽어보시옵소서.”

말은 그렇게 공손하였으나 실상인즉 구석지고 막힌 곳으로 의제를 내쫓는 셈이었다. 의제는 기가 막혔으나 힘없는 천자가 무슨 수로 천하를 움켜잡고 있는 패왕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패왕이 그렇게라도 보살펴주는 데 오히려 감사하면서 떠날 채비를 하게 했다.

하지만 무상한 게 권력이요, 못 믿을 게 권력주변을 맴도는 군상들의 심성이었다. 그래도 의제로 받들어지고, 겉으로라도 천자대접을 받을 때는 충성을 내세우며 주변에서 웅성거리던 조신들과 옛 초나라 귀족 떨거지들은 하루아침에 등을 돌렸다. 모두 패왕의 눈치를 보며 팽성에 남을 궁리만 하니, 의제를 모시고 장사로 떠나려는 사람은 한줌도 되지 않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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