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03>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7월 13일 18시 16분


대장군 韓信(2)

“아침상을 받는 척하다가 갑자기 수저를 내던지고 마구간으로 내닫더니 가장 빠른 말을 골라 타고 동쪽으로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무슨 급한 볼일이 있었겠지. 설마 승상이….”

한왕(漢王) 유방이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번쾌가 그게 더욱 분통 터진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처음에는 그리 알고 기다렸지요. 그런데 한참 뒤에 폐구(廢丘)로 빠지는 동쪽 곡구(谷口)를 지키던 부장(部將) 하나가 알려 왔습니다. 소하가 승상임을 내세워 파수 보는 군사의 물음에 대답도 않고 말을 달려 동쪽으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 점심나절에는 다시 그 곡구에서 동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곳의 진장(鎭將) 하나가 똑같은 전갈을 해왔습니다. 그리고도 다시 한식경, 이제 더는 전갈이 없는 걸 보고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이게 달아난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기는 번쾌도 그리 경박한 성품은 아니었다. 그제야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는지 한왕의 낯이 일그러지며 숨결이 거칠어졌다.

“승상이 어찌하여 달아났단 말인가. 승상이 어찌하여 나를 버렸는가….”

그러면서 손발이라도 잃은 사람처럼 어찌할 줄 몰라 하며 허둥댔다.

돌이켜보면 소하는 장돌뱅이 유계(劉季)를 한왕 유방으로 올려 세우는 데 누구보다도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소하는 패현의 주리(主吏)로서 일찍부터 유계의 비범함을 알아보았고, 또 저잣거리 건달들과의 마뜩찮은 거래로 언제나 범죄 언저리를 기웃대는 그를 보호하였다. 늦은 나이지만 유계가 정장(亭長) 노릇이라도 할 수 있게 주선한 것도 소하였으며, 그가 역도(役徒)들과 함양으로 부역 갈 때 패현의 다른 벼슬아치들은 300전인데 소하만은 500전을 여비로 내놓아 남다른 믿음과 기대를 드러냈다.

유계를 패공(沛公)으로 만든 데도 소하의 공이 가장 컸다. 현령을 부추겨, 죄를 짓고 숨어살던 유계를 패현으로 불러들이게 한 것도 그였으며, 현령이 다시 의심을 품었을 때는 조참과 함께 성을 빠져 나가 유계에게 투항함으로써 성 안의 사기를 꺾어놓았다. 나중에 유계가 글로 성안 부로(父老)들을 달랠 때도 소하가 유계 편에 서 있다는 게 큰 힘이 되었다.

유계가 패공 유방으로 다시 출발한 뒤에도 그랬다. 싸움터라 도필리(刀筆吏)인 소하의 업적이 그리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가 없는 패공의 군대는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번쾌나 주발, 관영 같은 장수들의 용력에 못지않게 소하가 빈틈없이 돌본 병참과 보급도 패공의 세력을 키우는 데 큰 몫을 했다. 특히 함양에서 소하가 손에 넣은 진나라의 문서와 전적은 당장이라도 한왕 유방이 천하대세를 읽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자료였다.

한왕은 그런 소하가 자신을 떠났다는 데 크게 상심했다. 먹고 마시기조차 잊고 하루를 보낸 뒤 이튿날 새벽같이 태복 하후영을 불러 말했다.

“아무래도 아니 되겠다. 태복(太僕)은 어서 나가 빠른 말들을 골라 수레에 매고 기다려라. 내가 소 승상을 직접 찾아봐야겠다.”

그러자 하후영이 왠지 감회에 찬 얼굴로 한왕을 가만히 올려보다가 억지 부리는 아이 달래듯 차분한 어조로 말렸다.

글 이문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