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07>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7월 18일 17시 28분


대장군 韓信(6)

“이제 대왕께서 동쪽으로 돌아가신 뒤에 더불어 천하를 다투시려고 하는 이는 항왕(項王)이 아니시옵니까?”

군례를 마친 뒤 그렇게 한왕에게 묻는 한신의 목소리도 불평으로 뒤틀리거나 허풍으로 들떠있던 지난날의 그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 맑고 우렁찬 목소리에 실린 물음을 전에 없이 진지하고 겸허해진 한왕이 받았다.

“그러하오.”

“대왕께서 스스로 헤아리시기에 씩씩함과 사나움, 어짊과 굳셈(勇悍仁强)에서 항왕과 견주어 어느 쪽이 낫다고 보십니까?”

한신의 그와 같이 거침없는 물음에 한왕이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다시 덤덤하게 받았다.

“과인이 항왕에 미치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한신이 문득 한왕에게 두 번 절하여 우러르는 뜻을 드러낸 뒤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번 이길 수 있다 하였으니, 예부터 나를 아는 것은 장수된 자의 으뜸가는 덕목(德目)이라 하였습니다. 대왕께서 바로 그 덕목을 지니셨음을 진심으로 경하(敬賀)드립니다.

실은 이 한신이 보기에도 대왕께서는 씩씩함과 사나움, 어짊과 굳셈에서 모두 항왕에게 미치지 못하십니다. 허나 신(臣)은 일찍이 항왕을 섬겨 보았기에 그 사람됨을 알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신이 아는 바대로 말씀드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대장군은 서슴지 말고 가르침을 이어주시오.”

“항왕이 성내어 큰소리로 꾸짖으면 뭇사람이 모두 떨며 엎드리게 됩니다. 허나 어진 장수를 믿고 군권(軍權)을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匹夫)의 용맹일 뿐입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할 때는 공경하는 듯하고 자애로우며, 그 말은 은근하고 부드럽습니다. 누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눠줄 만큼 인정이 넘칩니다. 하지만 자기가 부리는 사람이 공을 세워 마땅히 땅을 갈라주고 벼슬을 내려야할 때에 이르러서는, 내주기가 아까워 그 도장 모서리가 닳고 인수(印綬)가 헤지도록 붙들고 있습니다. 이는 이른바 여인네의 어짊(婦女之仁)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항왕의 용맹도 어짊도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항왕이 비록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어 여러 제후들을 신하로 삼았지만 관중에 있지 못하고 팽성에 도읍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 안목이 보잘 것 없어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릴 땅을 버리고, 사방으로 적을 맞게 되는 길거리에 나앉은 꼴입니다. 또 항왕은 일찍이 의제(義帝)께서 제후들에게 하신 약조를 저버리고 자기가 가깝게 여기는 순서대로 땅을 갈라주며 왕과 제후를 세웠습니다. 이는 불공평한 일이니 반드시 그 뒤탈이 있을 것입니다.

항왕은 의제를 강남(江南)으로 옮겨 만족(蠻族)의 땅 한구석으로 내쫓으려 합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제후들은 그걸 보고 자기 임금을 쫓아내고, 그 좋은 땅을 뺏어 스스로 임금이 되었습니다. 항왕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모두 떼죽음을 당하고, 그 성읍(城邑)은 모두 잿더미가 됩니다….”

그런 한신의 말은 거침없이 흐르는 물결처럼 이어졌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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