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14>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7월 26일 18시 38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대장군 韓信(13)

“번(樊) 장군께서 연일 술에 취하여 군사들을 모질게 몰아대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게으르고 느리다며 매질인데, 심하면 죽이기까지 하니, 그러잖아도 불평 많던 군사들은 벌써부터 떼를 지어 달아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길 떠난 지 닷새밖에 안 됐는데 머릿수가 이미 100이 넘게 줄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식(蝕)골짜기에 이르기도 전에 잔도(棧道)를 닦을 군사가 하나도 남지 않겠습니다.”

그 말로 미루어 번쾌는 뒤틀린 심사를 군사들에게 풀고 있는 듯했다. 한왕도 따로 소식을 듣는 데가 있는지, 오래잖아 그 일을 들어 알았다. 그날로 한신을 불러들여 걱정했다.

“원래도 그 머릿수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인데 군사들까지 달아난다니 큰일이외다. 번쾌가 마침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실로 걱정이오.”

그제야 한신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새삼 한왕에게 빌듯이 말했다.

“장함을 속이기 위해 번 장군을 격동시키려 하다보니 대왕까지 속이게 되었습니다. 군사를 부리는 데는 속임수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지만(兵不厭詐), 남의 신하되어 임금을 속이는 죄 또한 작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은 이번에 번 장군을 짐짓 몰아댄 것은 성난 번 장군이 더 모질게 군사들을 몰아대 더 많은 우리 군사가 장함 쪽으로 달아나도록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장함의 이목을 잔도 쪽에 잡아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이제 아무 염려 마시고 다시 노약한 군사 500명만 더 잔도 쪽으로 보내 주십시오. 번장군의 매질을 못 견뎌 달아난 우리 군사들은 반드시 장함의 군사들을 찾아갈 것인데, 그때도 잔도를 닦는 우리 군사들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동쪽으로 나가는 길은 잔도밖에 없음을 적이 믿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한왕도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이름 없는 부장(部將) 하나를 뽑아 노약한 군사 500명을 주며 번쾌를 뒤따라가게 했다.

“이제 고도(古道)로는 언제 군사를 낼 것이오?”

잔도를 닦으러 가는 두 번째 군사들을 보낸 날 한왕은 다음 일이 궁금하다는 듯 한신에게 은근히 물었다. 한신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번 장군이 군사를 모두 잃고 기일을 넘겨 죄를 빌러 올 때쯤이 좋겠습니다. 다만 그전에 먼저 해두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첫째는 병력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장구한 계책입니다. 이제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나가게 되면 짧아도 몇 년은 길고 힘든 싸움을 치러야 합니다. 옛날같이 유민들을 긁어모아 되는 대로 먹고 입히며 오직 함양(咸陽)만 바라보고 밀고나가는 그런 마구잡이 싸움이 아닙니다. 각기 봉지(封地)를 근거로 병력과 물자를 수급 받아 이곳저곳에서 세력을 다투면서, 한 발 한 발 천하의 대세를 결정해가는 나라들 사이의 길고 소모적인 전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싸움으로 비어버린 머릿수와 필요한 물자를 제때에 채우지 못하면 천하쟁패는 영 글러지고 맙니다.”

“군사들의 머릿수를 헤아려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라면 소(蕭)승상이 잘 해나가고 있소. 앞으로도 승상에게 맡기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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