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갈래의 한군이 모두 모여든 데다 한왕과 한신까지 와서 보고 있으니 태성(4城)이 아무리 크고 굳다 해도 견뎌낼 수가 없었다. 다음날 번쾌가 큰칼을 휘두르며 앞장서 성벽을 기어오르고, 다른 장수들도 저마다 군사들을 휘몰아 성을 들이치자 태성은 하루도 배겨내지 못하고 떨어졌다.
보름도 안돼 옹(雍)나라의 서북을 모두 거둬들인 한신은 그 기세를 몰아 다시 호치로 돌아갔다. 호치(好치)성 안에는 원래의 현군(縣軍) 3000명에 장평이 쫓겨들며 이끌고 온 군사 1만여명이 더 있었다. 합쳐 2만 가까운 군사가 지난번 관동(關東) 군사들이 왔을 때 싸움을 겪지 않아 손상을 입지 않은 성벽에 의지하니 태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서북의 모든 성읍이 한군의 손에 들어간 뒤라 호치성의 기세는 전과 같지 못했다. 적군 가운데 외롭고 고단한 섬처럼 남아 있는 호치성의 처지를 알게 된 성 안 장졸들은 전보다 몇 배나 늘어난 한군이 다시 성을 에워싸자 겁부터 먹었다. 겁먹고 움츠러들기는 장평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못해 장졸들의 기세를 북돋우며 싸울 채비를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에움을 헤치고 달아날 길을 찾기에 바빴다.
그래도 한신은 적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전군을 들어 호치성을 들이치기 전날 밤 장수들을 불러놓고 당부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궁한 도적은 급하게 쫓지 말라(궁구막추·窮寇莫追)고 했소. 지금 장평은 여러 날 호치성에 갇혀 지냈으나 성안에는 3만 군민이 함께 있소. 그들이 죽기로 싸운다면 우리가 성을 떨어뜨린다 해도 적지 않은 군사가 죽거나 다칠 것이오. 내일 힘을 다해 성을 들이치되 북문 쪽은 비워두어 저들이 달아날 길을 열어두시오!”
이튿날 한군이 호치성을 들이칠 때도 누구보다 두드러진 공을 세운 장수는 번쾌였다. 태성에서처럼 번쾌는 가장 먼저 성벽으로 뛰어올랐고, 성벽 한 모퉁이를 빼앗아 한군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때 앞을 가로 막는 옹군(雍軍) 가운데 현령(縣令)과 현승(縣丞) 한사람씩과 사졸 열한 명을 쳐 죽이고, 그 기세에 놀라 창칼을 내던지며 목숨을 비는 적병 스무 명을 포로로 잡았다. 나중 일이지만 번쾌는 그 공으로 낭중기장(郎中騎將)에 올랐다.
원래 장평을 호치성으로 몰아넣은 조참과 주발도 그날 싸움에서 남다른 공을 세웠다. 두 사람이 앞 다투어 성벽 위로 기어오르자 군사들도 바윗돌과 화살 비를 겁내지 않고 뒤를 따랐다. 특히 주발은 강한 활로 잇달아 적을 쏘아 죽이니 아무도 그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성루 높은 곳에서 행여나 하며 싸움 시늉을 내고 있던 장평은 그 같은 한군의 기세에 질려버렸다.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한군이 비워놓은 북문으로 한 목숨 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마음 같아서는 폐구에 있는 형 장함에게로 가고 싶었으나, 한군이 그쪽 길을 뒤덮고 있어 그리하지 못하고 멀리 길을 돌아 북지(北地)로 가서 숨었다.
“이제는 함양이다. 함양을 우려 뽑아 동쪽까지 깨끗이 쓸어버린 뒤에 다시 힘을 합쳐 폐구를 들이치고 장함을 사로잡자!”
한신이 그렇게 소리치며 이번에는 장졸들을 함양으로 몰았다. 장함이 폐구를 도읍으로 삼는 바람에 옹 땅 한구석으로 밀려나기는 했으나, 그래도 함양은 한때 진나라가 도읍하여 천하를 아우른 땅이었다. 지키는 군사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장수도 만만치 않았다.
글 이문열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