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33>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8월 17일 19시 24분


대쪽을 쪼개듯 (18)

“그리 대단한 물이 아니다. 기껏해야 성안을 한번 적시고 빠져나갈 것이니 너무 겁먹거나 놀라지 말라!”

옹왕 장함이 그렇게 장졸들을 북돋고 다그쳤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안의 처지는 나빠져 갔다. 오래잖아 홍수는 폐구 성벽을 넘어 성안을 온통 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물에 젖은 성안 군민(軍民)들은 저마다 놀란 외침을 내지르며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어디서 나왔는지 한군(漢軍)이 가득 탄 뗏목과 나룻배가 모래 자루로 막은 강둑을 따라 줄줄이 성안으로 흘러들었다. 뗏목과 배에 나누어 탄 한군들은 물고기나 건지듯 몇 군데 높은 성벽과 성루에 몰려있는 옹군(雍軍)을 거둬들였다. 위태로운 섬처럼 남아있는 곳에서 홍수를 피하고 있던 옹군 장졸들은 항복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한군들의 배로 옮아 탔다.

드디어 장함도 일이 글렀음을 알아차렸다. 한군들이 탄 여러 척의 배와 뗏목이 자신이 있는 성루로 몰려들고 몰려드는 걸 보고 가만히 칼을 빼들었다.

‘틀렸다. 하지만 이제는 저 은허(殷墟)에서처럼 항복해서 목숨을 빌 곳도 없구나. 내 남아대장부로 태어나 어찌 일생 두 번씩이나 항복으로 목숨을 구걸하겠는가. 그래도 명색 한 땅의 임금이었으니 임금답게 죽을 뿐이다.’

장함은 그렇게 자신을 다잡으며 빼든 칼로 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20만의 진나라 사졸들이 항우에 의해 산 채 흙구덩이에 묻힐 때조차도 모르는 척 아껴 살아남은 목숨이었다.

폐구를 수몰시키고 장함을 자살하게 한 한신은 다음날로 군사를 동쪽 새(塞)땅으로 몰았다.

“새왕(塞王) 사마흔은 대세의 향방을 가늠하는 눈이 밝은 자이나, 그도 장함처럼 이미 한번 항우에게 항복한 적이 있다는 게 우리에게 항복하기를 주저하게 만들 것입니다. 거기다가 사마흔은 옛날 역양현 옥연(獄椽)이었을 때부터 무신군 항량과 패왕 항우 숙질(叔姪)과는 별난 인연이 있어 쉽게 우리를 맞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빠르고 무서운 기세로 억눌러 항복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신이 한왕에게 그렇게 말하며 군사를 새왕 사마흔이 도읍으로 삼고 있는 역양((력,역)陽)으로 옮기게 하자 관영이 나서 말했다.

“빠르고 사나운 기세라면 말과 싸움수레로 적진을 휩쓰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저와 등공(등公)에게 3000기(騎)와 싸움수레 100여대만 내어주신다면 한발 앞서 달려 나가 역양을 들이치고 사마흔의 항복을 받아보겠습니다. 그리하면 새 땅을 평정하는 데 드는 날수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태여 대군을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곁에 있던 한왕도 관영의 말을 거들었다.

“아마도 중알자(中謁者) 관영과 등공 하후영이 폐구성을 수몰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번쾌와 조참을 부러워해서 하는 청인 듯싶소. 대장군이 못 이긴 척 들어주는 것도 대군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하루빨리 역양을 우려 빼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자 한신도 굳이 관영과 하후영을 말리지 않았다. 진중에 있는 말과 수레를 있는 대로 긁어 둘에게 맡기고 3000군사와 더불어 역양성을 치게 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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