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81>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15일 18시 22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거록(鉅鹿)의 싸움에서도 전영(田榮)은 패왕 항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패왕이 왕리(王離)의 대군과 피투성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성안에 갇혀 있던 조왕(趙王)과 장이 외에도 적지 않은 제후들이 군사를 내어 함께 싸워주었다. 그러나 조카 전불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재상이 되어 제(齊)나라의 실권을 틀어쥐고 있던 전영은 화살 한 대 보태주지 않았다.

패왕이 관중으로 쳐들어갈 때도 그랬다.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패왕을 따라 진나라를 쳐 없애는 데 공을 다투었으나, 전영만은 제나라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 패왕은 그의 힘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그 교만과 오기가 미워 가만히 이를 사려 물며 뒷날을 별렀다.

그 뒤 진나라를 쳐 없앤 패왕이 홍문에서 천하대세를 장악하자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것도 전영이었다. 전영은 패왕이 제나라 왕으로 보낸 전도(田都)를 쳐부수어 내쫓고, 교동왕(膠東王)으로 돌린 전불을 즉묵(卽墨)까지 따라가 죽였다. 그리고 팽월을 시켜 패왕이 제북왕(齊北王)으로 보낸 전안(田安)마저 죽여 버렸다.

하지만 전영의 도전은 패왕이 정해 보낸 삼제(三齊)왕을 모두 죽이거나 내쫓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 땅을 아우른 다음 스스로 제왕(齊王)이 되어, 천하를 분봉(分封)한 패왕의 권위에 정면으로 맞섰다.

직접은 아니라도 패왕이 된 항우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인 것도 전영이었다. 전영이 팽월을 시켜 서초(西楚)땅을 노략질하게 하자, 패왕은 소공(蕭公) 각(角)에게 군사 3만을 주어 팽월을 치게 했다. 팽월은 그 소공 각이 이끈 서초의 대군을 양(梁) 땅에서 여지없이 쳐부수어 버리는데, 그때 팽월의 신분은 제왕 전영의 장군이었고, 그 군사는 제군(齊軍)의 기호(旗號)를 쓰고 있었다.

한왕 유방에 가려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찌 보면 전영은 초기의 패왕을 가장 애먹이고 힘들게 한 맞수였다. 그리고 그가 근거했던 제나라도 끝까지 천하대세의 향방을 가늠하는 저울추 노릇을 한다.

하지만 패왕으로 하여금 죽은 뒤까지도 전영을 미워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때 그런 곳에다 자신을 끌어다 놓은 일이었다. ‘그런 때’란 한왕 유방이 관중을 모두 차지하고, 그것도 모자라 관외의 한(韓)나라와 하남(河南)까지 삼켜버린 심상찮은 때를 말한다. ‘그런 곳’은 유방이 다시 하동(河東)과 하내(河內)를 휩쓸고 있다는데, 자신은 엉뚱하게도 전영의 졸개들에게 끌려 다니고 있는 산동 북쪽 땅을 말한다.

원래 패왕은 한왕 유방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항량이 살아있을 때 유방에게 보인 까닭모를 호의가 기억에 남아있었고, 또 여러 달 함께 싸우며 진나라의 성읍(城邑)을 거둬들일 때 동고동락한 정도 있었다.

가까이서 보아 알게 된 유방의 무능이나 결함도 패왕을 마음 편하게 했다. 패왕은 개인적인 용력(勇力)도 군사를 부리는 재주도 신통찮은 주제에 맺고 끊는 데 없이 수하 장수들과 한 덩이로 어울려 뒹구는 유방을 장수로서는 처음부터 얕보았다. 거기다가 유방의 감출 줄 모르는 물욕과 군막 안까지 여자들을 끌어들일 정도로 지저분한 행실은 유방을 난세의 바람을 잘 탄 늙은 오입쟁이쯤으로 여기게 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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