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91>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27일 17시 56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패왕 항우의 대군이 성양을 에워싼 것은 다음날 한낮이었다. 패왕은 먼저 성루 아래로 가 전횡을 불러내고 항복을 권했다. 그러나 전횡이 욕설과 함께 내던진 것은 패왕이 세운 제왕(齊王) 전가(田假)의 목이었다.

이에 성이 난 패왕은 그날로 성양을 들이치기 시작했으나 싸움은 뜻과 같지 못했다. 미리 성안에 들어 싸울 채비를 하고 있던 성안의 제군(齊軍)은 먼저 화살비와 돌벼락으로 초군이 성벽으로 다가오는 걸 막았다. 그리고 간혹 용맹을 뽐내며 성벽을 기어오른 초나라의 장졸이 있어도 겁내거나 움츠리는 법 없이 성벽 아래로 밀어냈다.

“아니 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장졸을 물려 쉬게 하고 내일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성을 치도록 하시지요. 싸움이 길어질지도 모르니 따로 성벽을 허물고 성문을 깰 연장들도 마련해야 할 듯합니다.”

범증이 펄펄 뛰며 군사를 몰아대는 패왕을 말렸다. 거기다가 그사이 날도 저물어 와 패왕은 하는 수 없이 공격을 멈추었다.

하지만 하룻밤 편히 쉬고 채비를 갖춰 성을 쳐도 싸움은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나라 군사들이 맹렬히 들이치면 들이칠수록 성안의 군민들도 결사적이 되어 맞섰다. 그 바람에 다음날도 패왕은 장졸만 숱하게 잃고 아무 얻은 것 없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군을 들어 성양성을 들이쳤으나 잇달아 사흘을 내리 쫓겨나고 나서야 패왕은 점차 자신이 고약한 수렁에 빠져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해 가까이 실질적으로 제나라를 다스리며 그 힘을 모아 맞섰던 전영보다 져서 쫓기는 군민들을 긁어모은 전횡의 항전이 더욱 치열한 듯했다. 그러나 그 치열함이 지면 죽는 길밖에 없다는 절박감으로 제나라 사람들을 내몬 자신의 엄혹함과 비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패왕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열흘이 지나도 성양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패왕도 그곳의 싸움을 길게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처음 겪는 어려움이 패왕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초나라의 허술한 보급과 병참에서 비롯되는 어려움이었다.

패왕이 숙부 항량을 따라 처음 군사를 일으킨 곳은 그들 숙질이 오래 기반을 닦아 온 오중(吳中)이었고, 크게 세력을 불린 곳도 대개 초나라의 옛 땅이라 군사들을 먹일 곡식이나 싸움에 쓸 물자를 모으는 데 군색함이 없었다. 옛 초나라 유민들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나라 땅을 떠나 조나라를 구하고, 다시 서쪽으로 먼 길을 달려 함양까지 가서 싸웠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진나라의 폭정과 압제에 대한 반감이 큰 어려움 없이 그 군사를 먹이고 입힐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제나라 땅에 와서 싸움이 길어지자 사정은 달라졌다. 지니고 온 군량과 물자가 떨어지자 그 땅에서는 구해낼 길이 없었다. 민가를 뒤져 빼앗듯 곡식을 거둬들였으나, 백성들이 내놓을 마음이 전혀 없으니 거둬지는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에 패왕은 사람을 팽성으로 보내 급히 필요한 군량과 물자를 보내게 했으나 그마저도 바란 대로 되지 않았다. 군량과 물자를 실은 수레가 서초(西楚)의 경계를 벗어나 제나라 땅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이름도 모를 잡군(雜軍)의 공격을 받아 불살라지거나 빼앗기기 일쑤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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