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96>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2일 18시 11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산사람의 머리라면 목소리와 표정이 있고, 또 말을 시켜 캐물어 볼 수도 있지만, 목을 잘라 보내온 머리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목을 자를 때 피가 빠지고 옮기는 길에 피부가 말라 생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가 지금은 벌써 여름 4월로 접어드는 터라 소금에 절여 보내야 하니 원래 얼굴을 더욱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몇 개의 드러나는 특징만 장이(張耳)와 같으면 아무리 진여(陳餘)라도 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평이 그렇게 답해 놓고 까닭 모르게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낸 계책이 너무 독한 것이라 여겨 그런 듯했다. 하지만 제 발로 찾아와 항복한 상산왕 장이를 목 잘라 보낼 수는 없었다. 그자리에 있던 딴 사람들은 오히려 진평의 계책이 절묘하다 여겼다.

한왕 유방도 장이의 목을 내주지 않고 진여를 한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보았다. 곧 사람을 풀어 성 안팎을 가리지 않고 장이와 닮은 얼굴을 찾아보게 했다.

한나절도 안 돼 장이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자들이 대여섯 끌려왔다. 진평이 그 중에서도 가장 장이와 비슷한 자를 골라놓고 보니 한군(漢軍) 보졸(步卒)이었다. 진평은 그를 데리고 자신의 장막으로 가 술과 고기를 대접한 뒤 말하였다.

“한왕께서는 자네 머리를 빌려 큰일을 이루시려 하네. 부모와 처자는 한왕께서 돌봐주실 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죽어 주게. 만일 한나라가 천하 제후들을 모아 원통하게 돌아가신 의제(義帝)의 한을 풀어드리고 천하를 다시 아우르게 된다면 이는 모두 자네의 공으로 할 것이라고도 하셨네.”

그리고는 그 목을 잘라 머리를 조나라로 보냈다. 진평이 헤아린 대로 진여는 의심 없이 그 머리를 장이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날로 조왕(趙王) 헐(歇)을 달래 5만 군사를 한왕에게 보태기로 했다.

조나라가 한왕 유방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군을 보내자 관동의 다른 제후와 왕들도 다투어 군사를 보탰다. 항복했거나 사로잡힌 다섯 왕도 각기 제 봉토로 돌아가 적지 않은 군사를 긁어모아 왔으며, 스스로 항복해 와 왕위를 보존한 위왕(魏王) 표(豹)와 한왕 유방이 세운 한왕(韓王) 신(信)은 조나라에 못지않은 대군을 끌고 왔다.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에서도 적잖은 의군(義軍)이 이르렀다.

한왕도 관중으로 사람을 보내 군사와 물자를 끌어낼 수 있는 데까지 끌어냈다. 소하가 솜씨를 부려 긁어모은 수십만 석 군량과 3만 군사가 역상((력,역)商) 역이기((력,역)食其) 형제에게 이끌려 낙양에 이르렀다. 요관을 지킨다고 뒤처져 있던 주발의 군대도 한왕이 이끈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에 팽성으로 쳐들어가는 한나라 군사는 15만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관중(關中)은 폐구를 에워싼 군사들을 빼면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가 오면 천하가 모두 돕는다(時來天下皆同力)더니, 한왕의 기세가 치솟자 아직 제후의 열에 들지 못한 토호들과 뜻이 큰 초적(草賊)들도 가세했다. 그리하여 낙양현을 떠난 한군(漢軍)이 대량(大梁)을 지나 외황(外黃)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한군과 한왕을 따르는 제후들의 군사를 합쳐 50만에 가까운 대군이 되었다. 그런데 그 대군은 외황에서 또 한 차례 크게 부풀어 올랐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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