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36>卷五. 밀물과 썰물

  • 입력 2004년 12월 19일 18시 53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듣기로 범증과 계포가 이끄는 초군 본진은 아직도 초나라 경내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이 오늘 돌아온다 해도 패왕이 10만 대군을 만들어 여기까지 오려면 사흘은 걸릴 것이다. 나는 그 사흘이면 넉넉하다. 패왕이 이를 때쯤 이곳은 우리 장졸들이 펼친 진세로 철옹성(鐵甕城)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설령 우리보다 큰 군사를 이끌고 온다 해도 이제까지 그가 해온 대로 마구잡이 기세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대군과 대군이 병법(兵法)으로 맞서는 정규의 대회전(大會戰)이 된다. 그리되면 오히려 나야말로 한번도 져본 적이 없는 이 괴력의 사내에게 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한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장졸을 재촉했다. 그러나 영벽(靈壁) 동쪽의 벌판을 철옹성으로 만드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한군은 장졸이 모두 싸움에 지고 쫓기는 터라 마음이 한껏 어지러워져 있었다. 녹각이나 목책을 세우는 것이라면 몰라도 용도(甬道)를 파고 보루를 세워가며 적을 기다려 싸울 기세가 남아있지 않았다.

초여름 비로 수수(휴水)의 물이 불어있었던 것도 한군 장졸을 불안하게 했다. 가까운 곳에서는 배 없이 강을 건널 여울목이 없고, 배를 거둬들여 보았으나 인근 나루를 다 뒤져도 15만이 넘는 대군을 실어 나를 만한 배를 모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한군 장졸에게는 진채를 굳게 세우는 일보다 수수를 건널 방도를 찾는 일이 더욱 급해졌다.

한군 장졸의 심사가 그렇게 돌아가니 야전축성(野戰築城)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녹각과 목책은 흉내만 내고 용도와 보루는 파고 쌓는 시늉만 했다. 철옹성은커녕 기마대의 돌진을 막아낼 진채 울타리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더욱 고약한 일은 패왕이 한신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영벽으로 밀고든 것이었다. 어찌 보면 한군이 영벽에 진채를 얽기 시작한 그날부터 벌써 한초(漢楚) 양군의 접촉은 시작되고 있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초군의 추격을 막으며 뒤따라오느라 그날 낮에야 영벽에 이른 한군 후군(後軍)이 한신에게 알려왔다.

“초나라 척후가 줄곧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살피고 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헤아림만 믿고 있던 한신은 그 말을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

“항왕은 그렇게 멀리까지 척후를 보낼 만큼 차분하고 꼼꼼한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겁먹은 인근 군현(郡縣)의 이졸(吏卒)들이 가슴 졸이며 너희를 훔쳐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웃어넘기고 진채를 보강하는 일에만 마음을 쏟았다. 그런데 다음날 팽성 동쪽의 곡수(穀水)와 사수(泗水) 강변에서 용케 몸을 빼낸 제후군 부장(部將) 하나가 한군 진채로 찾아들면서 조짐은 한층 불길해졌다.

“곡수와 사수 가에서 패왕은 초나라 군사들을 별로 상하지 않고도 대왕을 따르던 10만 제후군을 몰살시켰습니다. 시체더미에 묻혀 죽은 척하며 초나라 군사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팽성에서 하룻밤을 쉬고는 바로 대왕을 사로잡으러 떠날 것이라 했습니다.”

그 부장이 울먹이며 한왕 유방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척후를 보내 뒤를 따르게 한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신은 자신에게 이틀은 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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