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40>卷五. 밀물과 썰물

  • 입력 2004년 12월 23일 18시 31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대장군 한신은 다시 전령을 한왕(韓王) 신(信)과 부관(傅寬)에게 보내 다음 싸움을 채비시켰다. 새왕(塞王) 사마흔과 적왕(翟王) 동예의 우군(右軍)에게 넘길 때까지 패왕을 가로막는 일이었다. 그 뒤로도 마찬가지로, 한신은 때가 되면 전령을 놓아 모든 장수들에게 그 맡은 바를 상기시킴으로써 싸움의 흐름을 자신이 바란 대로 이끌려 했다.

그런 한신의 전법에는 뒷날 해하성(垓下城)에서 보여준 십면(十面) 매복의 원형이 보인다. 그러나 영벽(靈壁) 동쪽의 싸움에서는 정교하면서도 치밀한 그 전법을 특유의 초절(超絶)한 기세로 몰아붙이는 패왕 항우로부터 지켜줄 장수들이 없었다. 아무리 튼튼한 방패로 막고 있어도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 위를 마구 내려치면 결국 쓰러질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았다.

그 불길한 조짐은 싸움의 첫 물꼬를 트라고 한신이 은근히 믿고 내보냈던 왕릉에게서부터 보였다.

“이 잔인무도한 초나라 역적 놈아. 그 목을 내놓아라! 원통하게 돌아가신 어머님의 제상에 써야겠다.”

왕릉이 그렇게 피맺힌 절규로 내달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벌써 주고받는 목소리부터 차이가 났다.

“이놈. 네 누구관대 감히 과인의 길을 막느냐?”

목소리에 무슨 기운을 불어넣었는지 패왕이 그렇게 외치자 가까이 있는 한나라 군사들은 귀를 막으며 주저앉고, 놀란 기병은 말 위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왕릉도 골수에 맺힌 원한을 잊고 앞뒤 없는 격분에서 퍼뜩 깨나 패왕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패왕은 긴 철극(鐵戟)을 휘두르며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왕릉이 급하게 큰 칼을 휘둘러 패왕의 한 창을 받아냈으나 그 힘이 얼마나 억세던지 칼을 든 팔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패왕의 엄청난 용력이 왕릉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어머니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제 한 몸 지키기에도 급급하여 진땀을 빼다가 한신이 당부한 열 합(合)도 견뎌내지 못하고 진채 안으로 달아났다.

왕릉의 용력이 결코 다른 장수들에게 뒤지지 않는데 그 꼴로 쫓겼으니, 그 뒤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한왕 신이 한나라 장수 부관과 함께 달려 나가 패왕 항우에게 맞서 보았으나 오래 버텨내기 어려웠다. 그런데 용저와 종리매 같은 초나라 맹장들이 다시 한꺼번에 덮쳐오니 무슨 수로 견디겠는가.

하지만 대장군 한신의 구상을 가장 심하게 뒤틀어놓은 것은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가 이끈 우군(右軍)이었다. 원래 사마흔과 동예는 진나라 장수 장함의 수하로 함께 패왕에게 항복하여 패왕 덕분에 왕 노릇까지 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다시 한왕에게 항복해 거기까지 따라왔으나 누구보다 패왕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사마흔과 동예가 이끈 군사들도 그 장수와 비슷했다. 부리기 쉬우라고 제후군을 모아주었으나, 그들 가운데는 패왕을 따라 함곡관을 넘어갔다 온 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턱없이 패왕을 겁내 사마흔과 동예를 장수로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화근이 되었다.

사마흔과 동예는 차례가 되어 그들을 이끌고 패왕을 맞으러 나가기는 했으나, 그들을 알아본 패왕의 외침에 벌써 반나마 얼이 빠졌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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