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81>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2월 14일 18시 11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대장군 한신도 팽성의 참패에서 받은 충격 때문인지 사람이 달라진 듯 변해 있었다. 한왕을 따라 팽성에 들 때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서생 티는 이제 깨끗이 벗겨지고, 일군의 총수(總帥)다운 과단성과 위엄을 갖추었다. 정령(政令)과 군령(軍令)을 엄격히 구분하여 싸움터에서는 군령을 우선시킬 줄 알았으며, 병가(兵家)로서도 한결 성숙하여 실전에서의 경험과 책으로 읽은 병법을 한가지로 조화시켜 쓸 수 있었다.

한신은 먼저 군사 3만을 풀어 형양에서 하수(河水=황하)에 이르기까지 100리 길에 용도(甬道)를 쌓게 했다. 그렇게 하여 오창의 곡식을 차지한 덕분에 한군은 멀리 관중에서 힘들여 군량을 날라 오지 않아도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었다. 한신은 또 번쾌에게 군사 1만을 주며 광무산을 지키게 해 초군(楚軍)의 급습을 막았다. 그리고 성고와 형양 사이의 봉수대와 급한 말이 오갈 길을 잘 손보아 그들 두 성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만들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형양과 성고, 오창을 잇는 삼각지역을 중심으로 한군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하지만 팽성에서 수십만 군사를 잃고 쫓겨온 후유증이 없을 리 없었다. 그 첫 번째가 제후와 왕들의 배신이었다. 진작에 초나라로 돌아간 한왕(韓王) 정창과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에 이어 위왕 표가 다시 한나라를 배신했다. 어버이의 병구완을 핑계 삼아 봉지로 돌아가더니 갑자기 하수 나루를 끊고 한왕에게 등을 돌렸다

“위표(魏豹) 이 아비 둘 가진 종자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당장 군사를 보내 잡아다 본때를 보여 줘야 하지 않겠소?”

성난 한왕이 그렇게 저잣거리 쌍욕까지 해대며 씨근댔으나 한신은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세상인심입니다. 앞으로 또 싸움에 져서 두 번 다시 이런 꼴을 당해서는 아니 됩니다. 위표를 사로잡는 일은 따로 알맞은 때가 있을 것이니, 대왕께서는 일시의 노여움으로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패전의 또 다른 후유증으로는 한군(漢軍) 장수들의 내분도 있었다. 두어 달 전에 초나라에서 도망쳐 온 도위 진평과 관영 주발 등 패현(沛縣)에서부터 따라온 오래된 장수들 사이의 알력이 그랬다. 첫눈에 한왕의 신임을 얻은 진평은 호군(護軍)을 맡고 참승(참乘)으로 한왕과 같은 수레를 탔는데, 그게 내분의 발단이 되었다. 자기들보다 훨씬 늦게 한왕을 따른 진평이 자신들을 감독하는 자리에 앉은 것만 해도 오래된 장수들로서는 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가 진평이 늘 한왕 곁에 붙어 갈수록 두터운 총애를 입으니 더욱 참기 어려웠다.

진평의 행실도 마뜩치 못한 데가 있었다. 처음 승세를 타고 팽성을 빼앗았을 때 한나라 장수들은 전리품으로 많은 금은을 거두었는데, 장수들 가운데 몇몇은 그 금은으로 진평에게 뇌물을 썼다. 진평이 맡은 호군이란 직책과 한왕에게서 받는 총애를 빌려 자신의 벼슬을 올리거나 좋은 자리를 따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진평은 망설임 없이 그 금은을 받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해 주었다.

하지만 곧 팽성 실함이 있고, 한군이 궤란(潰亂)에 빠지자 진평을 벼르던 풍(豊)패(沛)의 구장(舊將)들도 그 죄를 물을 겨를이 없었다. 저마다 한 목숨 건져 서초 땅을 빠져나오기 바빴다. 그러나 하읍(下邑)에서 다시 한왕을 만난 진평이 전처럼 한왕의 신임과 총애를 독차지하게 되면서 그의 묵은 허물도 되살아났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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