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00>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3월 8일 18시 21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내 남아로서 어찌 같은 적에게 두 번 항복하겠는가? 한왕에게 내 목을 가져가 바칠지언정 나를 산 채로 끌고 가지는 못할 것이다!”

위표가 그러면서 창을 꼬나들었다. 하지만 장한 것은 위표의 다짐뿐이었다. 위나라 장졸들은 거의 모두가 벌써 조참의 군사에게 앞길이 막힐 때부터 겁을 먹고 싸울 뜻을 잃어버렸다. 그러다가 한신의 대군까지 나타나 등 뒤를 막자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날 궁리부터 하는 자들까지 생겼다.

“나를 따라 길을 열어라! 이곳만 지나면 무사히 무원(武垣)에 이를 수 있다.”

위표가 그렇게 외치며 말을 박차 달려 나갔으나 따르는 장졸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털썩털썩 무기를 내려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항복의 뜻을 드러내는 군사들이 더 많았다. 그제야 일이 글렀음을 알아차린 위표는 들고 있던 창을 내던지고 칼을 뽑아들었다. 딴에는 스스로 목을 베어 죽을 작정이었다. 그때 대장군 백직이 와서 말렸다.

“대왕. 하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 원래는 사형에 처할 죄인을 용서해 살려주는 제왕의 덕)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한왕께서 대왕을 잊지 못하고 있으시다니 다시 한번 항복하여, 위로는 하늘의 덕에 따르고 아래로는 대왕을 따라 죽게 될 저 숱한 창맹(蒼氓)을 구해 주십시오.”

거기다가 뒤로는 한신의 대군이 덮쳐오고 앞으로는 울부짖는 처자를 태운 수레를 앞세운 조참이 다가왔다. 어지간한 위표도 더는 버텨내지 못하고 칼을 내던지며 말에서 내렸다. 털썩 소리 나게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장군인 한신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대장군 한신이 장졸들에게 에워싸여 다가오자 위표가 투구를 벗고 목을 길게 빼며 처연하게 말했다.

“대장군, 한나라를 저버린 죄는 모두 과인에게 있으니, 이 한 목을 베어 한왕께 죄를 빌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살려주시오.”

그 말에 한신이 차게 말했다.

“위왕의 죄를 다스릴 분은 오직 우리 대왕뿐이시오. 이 길로 형양으로 가 우리 대왕께 죄를 빌고 처분을 기다리시오. 항복하는 위나라 장졸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는 명을 내려 나머지 위나라 장졸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한신은 그날로 위표를 역마(驛馬)에 태워 한왕 유방이 있는 형양으로 압송했다. 그러나 도성인 안읍을 떨어뜨리고 왕인 위표를 사로잡았다고 해서 그걸로 위나라 정벌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위나라에는 아직도 패왕 항우의 기세를 더 무서워하는 장수와 호족들이 많아 곳곳에서 한신과 조참이 이끄는 한군에 맞섰다. 그 바람에 한신은 다시 보름을 더 써서야 위나라 땅을 온전히 평정할 수 있었다.

한신은 한왕 유방의 뜻을 받들어 위나라도 봉국(封國)을 폐지했다. 패왕이 서위(西魏)로 갈라준 땅에는 하동(河東) 상당(上黨) 태원(太原) 세 군(郡)을 두어 한나라의 관리들이 직접 다스리게 했다. 한 2년 9월의 일이었다.

그렇게 위나라 정벌의 뒤처리까지 마친 한신은 형양으로 돌아가는 대신 다시 눈길을 동쪽조나라로 돌렸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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