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부심이 오늘날의 패왕을 만들었지만, 앞날의 패망이 또한 거기서 비롯되겠지요.”
한왕의 탄식을 부러움에서 나온 걸로 보았는지 진평이 그렇게 빈정거리듯 받았다. 한왕이 갑자기 그런 진평에게 매달리듯 물었다.
“그렇다면 호군(護軍)에는 성고성을 떨어뜨려 자만에 찬 항왕을 낭패시킬 좋은 계책이 있는가?”
“성고성을 떨어뜨리는 일은 멀리 있는 항왕이 아니라, 성안에 있는 조구나 사마흔을 살펴 계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진평의 그와 같은 대답에 한왕이 다시 한번 매달리듯 말했다.
“그런 계책이 있다면 어서 말하라. 조구를 성 밖으로 끌어내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과인은 무슨 말이든 따르겠다.”
그러자 한동안 뜸을 들이던 진평이 조심스레 말했다.
“조구나 사마흔처럼 하찮은 벼슬에서 몸을 일으킨 자들에게는 두 가지 같은 병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평판에 얽매여 남의 이목을 두렵게 여기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질구레하지만 거듭된 성공으로 자라난 오기입니다. 특히 조구와 사마흔은 두 사람 모두 시골의 옥리(獄吏)에서 몸을 일으켜 왕후(王侯)의 줄에까지 끼어 서게 되었으니 그 병통은 남보다 훨씬 더할 것입니다. 대왕께서 그들의 그와 같은 병통을 도지게 하시면 성고성을 얻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병통을 도지게 할 수 있는가?”
“우선은 병졸들을 시켜 그들을 욕하게 하시되, 이전과는 달리 그들의 신의나 위엄과 관련된 평판을 깎아내리고 오기를 건드리는 말을 골라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에움을 풀고 물러나시면서 군사들로 하여금 깃발을 질질 끌고 항오(行伍)를 흩게 하여 저들이 그동안에 얻은 병가(兵家)로서의 평판과 오기를 건드려 보십시오. 저들은 반드시 성문을 열고 나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 말에 한왕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과인도 사상(泗上)의 정장(亭長)에서 몸을 일으켰으니 그 벼슬의 하찮음이 포의(布衣)나 다름없다. 그러나 장부가 큰 뜻을 펴려 하면 한때의 욕된 평판을 겁내거나 되잖은 오기로 시세와 맞서서는 아니 된다 믿고, 또 그리해 왔다. 그런데 저들이라고 그걸 모르겠느냐?”
그때 한왕과 진평이 주고받는 말을 한동안 듣고만 있던 장량이 가만히 끼어들었다.
“그것은 또 대왕께서 대왕이 되신 까닭이요, 장차 천하를 얻을 밑천이 될 것입니다. 사람마다 따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조구 따위겠습니까.”
그 말에 한왕의 얼굴이 치켜세워진 아이처럼 환해졌다. 그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당장부터라도 그렇게 해봅시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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