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74>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9월 30일 03시 07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군은 식량이 다해 급히 돌아간 듯합니다. 사수를 건너기 전 몇몇 마을을 덮쳐 씨앗으로 묻을 곡식까지 빼앗아 먹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 패왕께서 보내신 한 갈래 군사가 오창을 들이쳤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한군은 앞뒤로 적을 맞게 될까 두려워 급히 돌아간 것입니다.”

“패왕께서 벌써 팽월을 잡고 성고로 돌아오시는 중이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사수(5水) 건너편에서 온 백성이 양(梁) 땅을 오가는 장사꾼에게서 들었다고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모두 장량과 진평이 성고성에서 물러나면서 지어 퍼뜨린 헛소문이었다. 그러나 듣는 초나라 군사들에게는 한결같이 분통 터지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몰려 쫓겨가는 한나라 군사들에게 화살 한 대 날리지 못하고 성안에 처박혀 떨고 있었다는 게 부끄럽다 못해 속상하기까지 했다.

그 모든 일이 대사마 조구와 사마흔, 동예 같은 나이든 장수들이 겁이 많아 그리되었다 여긴 젊은 장수들과 이졸들이 저희끼리 둘러앉아 불평으로 웅성거렸다. 그 소문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길이 없는 조구도 답답했다. 소문이 정말이라면 겁쟁이에 졸장부란 소리를 듣게 생겼고, 적이 지어 퍼뜨린 헛소문이라 해도 당장은 그걸 밝힐 길이 없어 성안 군민의 비웃음과 빈정거림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찍 한왕 유방의 사자가 달려와 난데없는 전서(戰書) 한 통을 성안으로 던져놓고 갔다. 조구가 받아 읽어 보니 내용은 대략 이랬다.

‘서초(西楚) 해춘후(海春侯) 대사마(大司馬) 조구는 들으라.

지난날 듣기로, 기현((근,기)縣)에는 누워있는 용(와룡·臥龍) 같고 엎드린 범(복호·伏虎) 같은 호걸이 있어, 몸은 비록 옥리로서 낮게 있어도 그 뜻과 기상은 구름 위를 넘실거린다고 하였다. 그 뒤 난세의 풍운을 만나 천하를 휘젓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뉘 알랴, 그 용과 범은 이제 남의 집이나 지키는 개가 되고 말았구나. 허울은 좋아 왕후(王侯)를 일컬으나 주인 없는 성에 남아 그 재물과 가솔을 지키고 있으니 집 지키는 개와 다름이 무엇이랴. 대사마로서 허다한 병마를 거느리고서도 마침내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 성안에 틀어박힌 꼴이 더욱 주인의 엄명을 받아 집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개와 닮았다.

과인은 여러 날 너의 옛 뜻과 기상의 자취나마 엿보려고 애썼으나, 사람이 그 몸 두었던 바탕을 벗어나기는 정녕 이리 어려운가. 너는 스스로 시골 옥리의 금도(襟度)에 갇혀 천하의 이목을 돌아보지 않으니 실로 보기조차 딱하구나. 군사를 시켜 대엿새나 욕설로 격동시켜도 너는 성안에 틀어박혀 오직 항왕의 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데만 골몰하였다. 이에 과인은 군사를 물려 돌아가다가 그래도 세상의 평판이 너를 비웃는 게 애석해 다시 한번 기회를 주려 한다. 과인이 바라는 것은 성이 아니니, 우리 차라리 성고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한바탕 병진(兵陣)을 펼쳐봄이 어떠냐? 사수 동쪽 벌판이라면 설령 싸움에 져도 네 주인이 지키라고 엄명한 성은 잃지 않을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제후다운 제후요 이름만의 대사마가 아니라면 사수 벌판에서 당당하게 대군을 펼쳐 과인 장졸과 자웅을 겨뤄보도록 하라.’

누가 써준 글인지 모르나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러지 않아도 뒤틀릴 대로 뒤틀린 조구의 심사를 돋우고 오기를 건드렸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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