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83>卷七.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6년 2월 6일 03시 06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녹각과 목책을 뚫고 지나느라 느려지고 흩어지게 된 초군은 방벽과 보루를 하나하나 넘는 동안에 더욱 속도가 느려지고 머릿수는 잘게 나뉘어졌다. 그런 초군을 숨어 있던 한군이 뛰쳐나와 일시에 들이치니 싸움의 양상은 거꾸로 뒤집혔다. 뭉쳐 숨어 있던 한군이 나뉘어 느릿느릿 기어오르는 초군을 하나씩 쳐부수는 격이었다.

“징을 쳐서 군사를 거두어라. 내일 채비를 갖추어 다시 친다.”

처음 한군의 진채로 뛰어든 1만 가운데 3천이나 그대로 녹아 버린 듯 돌아 나오지 않자 사정을 짐작한 패왕이 그렇게 외쳤다. 날이 저문다는 핑계로 군사를 거둔 것이었으나, 그때 이미 패왕은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일껏 이겨 놓은 싸움이 다시 꼬여 가는 것은 아닌가. 유방, 이 흉측하고 교활한 늙은 것이 여기다 무슨 수작을 부려놓은 것인가.’

그날 밤 장졸들을 쉬게 한 패왕은 다음 날 다시 채비를 갖춰 한군 진채를 공격했다. 밤새 마련한 방패를 군사에게 넉넉하게 나눠 주고, 불화살을 쏘아붙일 망보기 수레(巢車·소차)까지 지어 앞세웠지만, 한군 진채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다시 군사만 몇천 잃고 물러나게 되자 패왕은 광무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아 차츰 초조해졌다.

‘또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는 꼴이 나는 것은 아닌가. 나는 3만 군사로 10만 대군을 쳐 그 절반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패잔병을 이 궁벽한 골짜기로 몰아넣었다고 믿었는데 도대체 어찌된 셈이냐. 유방은 처음부터 짜고 나를 꾀어 들인 것처럼 태평스럽지 않으냐? 이 싸움을 길게 끌다가는 또다시 우리만 외롭고 고단해지는 것은 아닌가. 이게 무슨 병법인지 도무지 알 수 없구나….’

패왕이 그런 생각으로 불안해하고 있는데 다시 고성 마을에 남겨 둔 본진에서 놀라운 전갈이 날아들었다.

“한군 한 갈래가 고성 마을에 있는 우리 후군(後軍)을 급습하여 군량을 불태우고 시양졸(시養卒)과 행궁(行宮)의 사람들을 많이 해쳤습니다. 항장(項莊) 장군께서 남은 인마를 보호해 이리로 오고 있는데 추격이 자못 사납습니다. 대왕께 구원을 청합니다.”

패왕은 한왕을 복격(伏擊)하러 떠날 때 항장에게 군사 5천을 주고 후군으로 남겨 고성 마을에 모아둔 군량과 패왕의 집안 친지 및 행궁의 시중들과 잡일꾼들을 지키게 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 가운데는 남장을 한 우(虞)미인도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후진이 한군의 기습을 받은 것이었다.

지난 1년 광무산의 뼈저린 경험으로 군량의 중요함을 배운 패왕은 그 뜻밖의 소식에 적잖이 기가 꺾였다. 거기다가 드러내 놓고 묻지는 못해도 우미인의 안위 또한 걱정이었다. 얼른 정공(丁公)에게 한 갈래 군사를 나눠 주며 항장부터 구원하게 했다.

오래잖아 정공이 항장의 후군을 구해 돌아왔다. 다행히도 우미인은 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시양졸 사이에 섞여 있었다. 패왕이 안도하는 낯빛을 감추며 항장에게 물었다.

“한군은 모두 저기 저 진채에 들어앉아 있는데 누가 그리로 가서 분탕질을 친 것이냐?”

“왕릉과 옹치였습니다. 아마도 우리 사정을 잘 아는 옹치가 꼬드겨 일을 낸 것 같습니다. 우리 군량을 태우고도 급박하게 뒤쫓는 척하다가 슬며시 사라졌습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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