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영시, 3월 중순인데도 내쉬는 입김이 하얗다. 혼을 불러들이기 위해 문을 열어둔 탓이다. 문밖에는 하얀 무명천이 깔려 있고, 돼지 머리, 근채(根菜), 과일, 구운 생선, 하얀 쌀밥, 비빔밥, 도토리묵, 시루떡, 한과, 막걸리가 죽 놓여 있다. 직사각형으로 접힌 바지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의 깃, 그리고 다리를 상징하는 무명천 위에 놓인 짚신 세 켤레 속에 1만원 짜리 지폐가 꽂혀 있다.
무당3 목소리밖에 듣지 못하는 혼인데 귓전에서 바람 소리가 시끄럽게 훼방을 놓는구나 내 귀여운 손녀새끼야 뛰자꾸나 뛰어 바람을 앞지르자꾸나
무당2 (떼를 쓰는 어린애처럼 유미리의 손을 잡아당긴다) 으응, 뛰자! 응
유미리는 폐에 고여둔 숨을 후욱 토해내면서 일어나 제자리걸음을 시작한다.
무당3 하나 둘 하나 둘 뛰면서 듣거라 하나 둘 하나 둘 간혹 내가 너 어깨를 찾아갔는데 아나 아이고 너는 타향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큐큐 파파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내가 막았다
너 어미도 애비도 몰랐다 아무도 모르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벨트에 목을 매었을 때도 높은 빌딩의 난간을 뛰어넘었을 때도 깊은 물을 들여다보았을 때도 알고 있나 내가 니를 막았다 큐큐 파파 큐큐 파파 이 할배가 같이 뛰어주마 하나 둘 하나 둘 같이 뛰면서 너의 과거를 만나게 해 주마 하나 둘 하나 둘 자 뛰자 워카든 내 손주야 뛰고 또 뛰면서 바람에게 묻거라 큐큐 파파 바람에게 강물의 시원을 캐묻거라
무당2 옛날에 할배는 소리도 잘 했잖아요. 할배, 소리 좀 해 봐요.
무당3 봄이 오는 아리랑 고개 제비 오는 아리랑 고개 가는 님은 밉상이요 오는 님은 곱상이라네 아리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님오는 고개 우러 우러도 우리 님은 안 넘어요 ①
무당2 뛰어! 더 빨리!
유미리 (팔을 앞뒤로 크게 내저으며 허벅지를 높이 들어올리고) 큐큐 파파, 큐큐 파파.
무당3 아직 시집은 안 갔나?
유미리 아이는 있지만, 남편은 없어요.
무당3 새끼는 어쩌고 왔나?
역자 주
①아리랑 낭랑 - 김연갑의 ‘아리랑 그 맛, 멋 그리고…’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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