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6…잃어버린 얼굴과 무수한 발소리(6)

  • 입력 2002년 4월 23일 18시 26분


잃어버린 얼굴과 무수한 발소리(6)

심야 영시, 3월 중순인데도 내쉬는 입김이 하얗다. 혼을 불러들이기 위해 문을 열어둔 탓이다. 문밖에는 하얀 무명천이 깔려 있고, 돼지 머리, 근채(根菜), 과일, 구운 생선, 하얀 쌀밥, 비빔밥, 도토리묵, 시루떡, 한과, 막걸리가 죽 놓여 있다. 직사각형으로 접힌 바지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의 깃, 그리고 다리를 상징하는 무명천 위에 놓인 짚신 세 켤레 속에 1만원 짜리 지폐가 꽂혀 있다.

무당3 목소리밖에 듣지 못하는 혼인데 귓전에서 바람 소리가 시끄럽게 훼방을 놓는구나 내 귀여운 손녀새끼야 뛰자꾸나 뛰어 바람을 앞지르자꾸나

무당2 (떼를 쓰는 어린애처럼 유미리의 손을 잡아당긴다) 으응, 뛰자! 응

유미리는 폐에 고여둔 숨을 후욱 토해내면서 일어나 제자리걸음을 시작한다.

무당3 하나 둘 하나 둘 뛰면서 듣거라 하나 둘 하나 둘 간혹 내가 너 어깨를 찾아갔는데 아나 아이고 너는 타향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큐큐 파파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내가 막았다

너 어미도 애비도 몰랐다 아무도 모르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벨트에 목을 매었을 때도 높은 빌딩의 난간을 뛰어넘었을 때도 깊은 물을 들여다보았을 때도 알고 있나 내가 니를 막았다 큐큐 파파 큐큐 파파 이 할배가 같이 뛰어주마 하나 둘 하나 둘 같이 뛰면서 너의 과거를 만나게 해 주마 하나 둘 하나 둘 자 뛰자 워카든 내 손주야 뛰고 또 뛰면서 바람에게 묻거라 큐큐 파파 바람에게 강물의 시원을 캐묻거라

무당2 옛날에 할배는 소리도 잘 했잖아요. 할배, 소리 좀 해 봐요.

무당3 봄이 오는 아리랑 고개 제비 오는 아리랑 고개 가는 님은 밉상이요 오는 님은 곱상이라네 아리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님오는 고개 우러 우러도 우리 님은 안 넘어요 ①

무당2 뛰어! 더 빨리!

유미리 (팔을 앞뒤로 크게 내저으며 허벅지를 높이 들어올리고) 큐큐 파파, 큐큐 파파.

무당3 아직 시집은 안 갔나?

유미리 아이는 있지만, 남편은 없어요.

무당3 새끼는 어쩌고 왔나?

역자 주

①아리랑 낭랑 - 김연갑의 ‘아리랑 그 맛, 멋 그리고…’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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