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14…잃어버린 얼굴과 무수한 발소리(14)

  • 입력 2002년 5월 7일 18시 04분


무당3 (파르르 떨리는 가냘픈 목소리로) 1941년 1월 맑게 개인 추운 날이었다 일본 공무원이 나와 온 집안을 소독하고 갔다 며칠이나 문을 활짝 열어놓았는데도 간코①의 냄새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 날부터 남편은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어

아픔에 몸부림치듯 은행나무 가지가 바람에 흩날린다.

박수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무당3 신태는 정말 착한 아이였다 너무 착해서 일찍 데리고 간 거야

죽음은 신태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고! 외동아들을 앞세운 어미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나!(앙다문 이 사이로 오열이 새어나온다) 그 사람은 신태의 이름을 빼았았어 세 여자가 낳은 여섯 자식에게 신(信)자가 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신철 신명(信明) 신호 신희 신화(信花) 신일(信一) 그 사람은 신태를 배신했어! 신태가 용서할 줄 아나! 신태는 몽달귀신이 되어 너거들을 저주하고 있다 너거들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너거들이 행복해지는 걸 내 두고 볼 줄 아나!

무당2 앗 나간다! 할매가 나가!

유미리 (일어서서 문을 향해 외친다) 기다려요! 가지 마세요!

박수 나무마하반야, 바라밀다…….

유미리 돌아와요!

무당2 (뒷짐을 지고 토라진 듯 바닥을 찬다) 아아, 가버렸어, 이제 돌아오지 않아. 문 뒤에 다른 할매가 숨어 있어. 일본 사람이야. 할배한테 일본 부인도 있었나?

유미리 있었어요. 네모토 후사코(根本ふさ子)씨예요.

무당3 (문밖으로 뛰어나가) 뻔뻔스러운 년! 우리 손주가 날 불렀어 썩 일본으로 돌아가!

무당2 앗, 너거 할매가 밀쳤어!

무당3 (얼굴과 온 몸으로 기쁨을 드러내며) 아이고! 우리 손주야! 미리야 미리야! 아이고 미리야!

무당은 유미리를 껴안는다.

유미리는 무당의 뜀박질하는 심장을 느낀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엉켜 점점 짙어진다.

무당3 (유미리의 뺨에 입술을 대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아이고 좋구나!

①간코 - 소독약의 상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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