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82…아리랑(21)

  • 입력 2002년 7월 26일 18시 26분


우철은 우홍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살짝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5반에 김원봉 장군의 여동생이 있다 아이가”

“복잠이 말이가? 울 엄마가 그라는데 후처 아라 카더라”

“그럼, 김원봉 장군하고는 배다른 형제겠네” 우철의 입에서 나와 귀로 들어온 목소리는 찍 늘어진 고무줄 같았다.

“같은 엄마한테서 태어난 남동생이 하나, 배다른 형제가 일곱, 여자는 복잠이 뿐이다. 우리 형이 익봉이 형하고 동급생이었다”

“그럼 이 삐라는 김익봉이 형한테서?”

“아니다. 그 가족은 경찰의 감시가 하도 심해서, 엽서 한 장 안 갖고 있다. 김원봉 장군하고도 8년이나 안 만났을 거다. 이건 형이,” 라고 하려다 우홍은 말을 삼켰다.

키 큰 풀이 살랑이고 있다. 30초가 흘렀다. 운동장에서 시끌시끌한 웃음소리가 일렁인다.1분쯤 더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에 지친 우철은 담에 기대어 다리를 쭉 뻗었다. 그 동작을 신호로 우홍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재작년 9월 1일, 관동 대지진 때 죽은 사람이 9만 명이라는데, 그 숫자에 조선 사람은 포함돼 있지 않다. 우철아, 얼마나 많은 조선 사람들이 벽돌장에 깔려 죽었을까? 지진으로 죽은 것만은 아니제. 조선 사람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엉터리 소문이 퍼져서, 순식간에 6천명의 동포가 살해당했다는 거 알고 있제? 경찰하고 군인만 나서서 죽인 거 아니다. 그냥 보통 일본 사람들도 그랬다. 얼굴만 봐 가지고서는 구별이 안 되니까, ‘쥬엔고M센(10엔50전)이라고 말해 보라’ 카고서, ‘츄엔고d센’하고 발음이 좀 이상하면, 일본도로 베고 곤봉으로 때리고 죽창으로 찔렀다. 남자만 당한 거 아니다, 여자도 어린아이도 갓난아기도 목 잘려서 통나무처럼 나뒹굴었다. 놈들은 아무 벌도 받지 않았다. 지금도 하얀 쌀밥 먹도 똥싸고 한다. 개도 제 손으로 죽이면 그 날은 밥맛이 하나도 없다 아이가? 태연하게 맛있는 밥 먹을 수 있으니까, 왜놈한테 조선 사람은 모기하고 파리나 마찬가지다”

내가 듣고 있는 것은 다케다 선생의 목소리가 아니고 우홍의 목소리인데, 왜 이렇게 딱딱한 의자에 억지로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왜 빨리 종이 치지 않는 걸까 하고 기다려지는 걸까, 우철은 자기 그림자와 우철의 그림자가 겹쳐 있는 부분을 응시했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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