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108…삼칠일 (7)

  • 입력 2002년 8월 26일 18시 43분


밤하늘이 뚜껑처럼 거리를 덮고 강과 산과 집을 어둠에 가두었을 때, 툇마루에서 기다림에 지쳐 있던 여자는 사립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다가오는 남자의 그림자를 그림처럼 바라보았다.

오늘은 시장이 서는 날이라서, 밥 먹을 틈도 없을 정도로 바빴다. 부산에 있는 도매상에 주문한 물건이 9시 기차로 도착해서, 리어커 끌고 역까지 달려가고, 짐 싣고 또 달리고….

…욕 봤네예….

거짓말, 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한 달에 여섯 번 시장이 서지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오지 않은 날은 한 번도 없었다. 변명 따위 하지 않아도 좋은데,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줄 아나?

당신을 꼭 닮았데예.

뭐라고?

여자는 웃었다.

…어디서 봤는데?

보기는요. 삼칠일까지 금줄이 쳐져 있는데, 어디서 본단 말입니까? 영남루에서 윗 형하고 스쳤을 뿐이라예, 어쩔 수 없지예, 가까이 사니까. 왜 그런 얼굴 하는데예?

여자는 남자의 손으로 손으로 뻗었지만, 손가락이 닿는 순간 남자는 얼굴을 돌리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침묵하고 있는 동안, 여자의 마음속으로 무수한 생각이 오갔다. 치성을 드렸다는 얘기는 하지 말자, 부부가 둘이서 기도를 올리는 경우도 있다지만 나는 이 사람의 아내가 아니다, 이 사람의 아내는 그 여자, 박희향이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우철이고, 둘째 아들은 우근, 맏딸의 이름은 소원.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죽은 남자아이의 이름은 식구가 아닌 다른 사람은 모른다. 초이레도 치르지 못하고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애장터에 묻혔으니. 그리고 또 한 명 거기에 묻힌 남자아이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하고 만나기 몇 년 전의 일이다. 그 여자가 낳은 아이는 남자아이가 넷에 여자아이가 하나, 아들 복이 많은 여자이리라….

4월, 5월, 6월, 이제 금방 여름이네예.

…어어.

난, 밀양에서 한발짝도 나가본 일이 없어예.

…대부분의 여자들이 다 그렇다 아이가.

만약, 여름이 되어서도 계속 만날 수 있으면, 부산에 데리고 가 주이소. 나, 밀양을 떠나보고 싶어예, 기차도 타보고 싶고, 바다도 보고 싶고.

…그라자.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같이 밤을 지내고, 같이 아침을 맞고 싶어예.

여자는 남자의 등을 두 팔로 껴안고, 남자의 왼쪽 가슴에 귀를 대고 고동소리를 들었다. 지금 그 말은 목소리가 되어 나왔나? 아니면 내가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린 것인가?

글 유미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