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174…1929년 11월 24일 (25)

  • 입력 2002년 11월 15일 18시 08분


누가 내 뒤에 서 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목도 움직일 수 없다. 가위에 눌렸다고 생각한 순간, 그 팔이 여자를 꼭 껴안았다. 당신? 당신인가예? 그 팔은 피부를 통하여 기억보다 확실한 것을 전했다. 네에, 알고 있습니다, 네에, 네에, 전부 알고 있어예.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힘을 빼고 툇마루에 앉자 그 팔도 슬며시 힘을 뺐다. 휭-휭 휭-휭, 바람이 등뒤의 기척을 데리고 가버렸다. 휭-휭, 여자는 자기 손으로 눈길을 떨궜다. 달빛을 받아 하얀 나비의 인분을 뿌린 것처럼 은빛으로 빛난다. 아무도 쥐어주지 않는 손….

쏴아 쏴아 쏴아 쏴아, 여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삼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삼나무 꼭대기에 달이 걸려 있다. 여자는 달을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힐문하듯 응시하였다.

잘못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예.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안 만났던 것으로 할 수가 없었어예. 나는 그 사람을 만나,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몇 개나 넘었습니다. 얼굴을 들고, 손을 맞잡고, 그 사람과 둘이서.

당신, 내 목소리가 들립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만난 것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던 것을 수치라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허벅지 근육이 잘게 떨리고, 키득키득 입에서 웃음이 번져 나왔다. 내가 미쳤나? 아니지, 미치지 않았지. 왜 안 미치는고? 어쩌면 미치는고? 이 아픔도, 이 아픔도, 이 아픔도, 모두 당신한테 안겼던 흔적입니다. 당신 몸에는 아무 흔적도 안 남아 있지예? 하지만 내 몸에는 이렇게 또렷하게 아픔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이 몸을 떠나 어디론가 가고 싶습니다, 멀리, 멀리, 한없이 멀리.

달빛이 여자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생각에 살며시 손가락을 넣었다. 풀어도 풀어도 금방 뒤엉켜, 밝고 싸늘한 빛으로 비춰내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이름뿐이었다. 그 바람을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고 여자는 아픈 배를 부둥켜안고 이를 악물었다. 용하. 이 사이로 이름이 흘러나왔다. 여자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 그 이름을 웅얼거렸다. 용하, 용하, 용하, 용하….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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