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자는 이미 바늘도, 바늘에 찔린 손바닥도, 피로 얼룩진 비단 옷감도 보고 있지 않았다. 작은할아버지의 부고를 전한 그 남자의 입만 응시하고 있었다.
“자세한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강우홍이란 남자는 훈장이 달려 있는 모자를 벗었다.
어머니가 일어나 아버지 옆에 섰다.
“먼 데서 이렇게 일부러 와줘서 고맙습니다. 자, 이리 올라오이소….” 어머니는 우뚝 선 채 마당 우물가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등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남자가 윗목에 앉자 어머니는 그 앞에 막걸리가 담긴 사발을 내려놓았다.
“제 형님도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얘기가 길어질 낀데….” 남자는 막걸리를 들이켜고,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위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듯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우리는, 1938년 10월에 우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습니다. 물론 김원봉 동지와 윤세주 동지가 중심이었습니다. 팔로군, 신사군과 함께 왜적에게 게릴라전을 펼쳤는데, 난징에 이어 무한이 함락돼서, 충칭까지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륙에서는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항일 투쟁을 계속했지만, 다들 각지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일이란 대의 아래 화베이에 결집하자고, 그래 의논을 해서 김원봉 동지가 의용대원 2할과 충칭 본부에 남고, 윤세주 동지는 나머지 8할을 이끌고 화베이로 향한 깁니다. 그들은 무력 투쟁에 승리하기 위해 몸을 단련한 독립투사들이라예. 그중에 우리 형도 있었습니다. 저는 충칭에 남았습니다. 거기서 운명이 갈린 깁니다.
1941년 1월 1일, 조선의용대는 1진, 2진, 3진으로 나뉘어 배를 타고 화베이로 향했습니다. 7월에는 상무촌이란 곳에서 전 대원이 결집했고예. 형은 제1진, 윤세주 동지는 제3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25일에 태행산이란 곳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 육군 약 6만, 조선의용대와 팔로군이 4000명,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서 우리 군은 태행산을 방패로 삼았습니다. 광복 후에 형의 시신을 찾으러 가 봤는데 정말 험악한 곳입디다. 그냥 걷기도 쉽지가 않더라고예,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없는 바위투성이 산악지대라 말 그대로 천연의 요새였습니다. 그곳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진 기라예.”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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