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526회…셔플 XⅥ 탑 또는 신의 집 (5)

  • 입력 2004년 3월 15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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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갈 때 말고는 어두운 공장 안에 갇혀, 옷도 속옷도 1년 전 연행될 때 그대로, 세수조차 할 수 없습니다. 식사는 아침, 점심, 저녁 때 한 개씩 주는 보리주먹밥이 전부입니다. 대변을 보면서 몇 번이나 피를 흘렸지만, 괜한 짓을 하면 처분 당할 수도 있어 잠자코 있었습니다. 생리도 없어졌습니다. 초경을 치르고는 그만 멈추고 만 것입니다.

밀양은 좁은 동네라 사람들 대부분 서로 얼굴을 압니다. 사찰계나 CIC 스파이는 낯설고 젊은 남자들이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저 여자애가 누구지” 하며 놀랍니다. 누가 “김원봉의 여동생”이라고 하면 “아아, 닮았어. 아주 똑 닮았어”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합판으로 된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는데, 칸막이 너머로 말을 걸거나 넘어가면 징계를 당하지만, 어차피 급조한 것이라 여기저기 빈틈이 많습니다. 나는 오빠를, 오빠는 나를 보고 눈짓을 나누면서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고!

1951년 11월 15일이 덕봉 오빠의 기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이가 없어도 머릿속으로는 큰오빠가 준 연필을 쥐고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나는 울지 않는다. 울어봐야 오빠들은 되살아오지 않고, 석방되지도 않는다. 울어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나는 감정도 필요없다. 감정은 나를 지탱해주지 않는다.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은 언어와 자부심뿐.

나는 어젯밤, 사는 자의 대열에 끼었습니다. 아마 나까지 죽이지는 않겠지요. 그렇다면 무슨 짓을 해서든 살아남을 것입니다. 살아남아서, 이 나카노 공장에서 나갈 것입니다. 살아서, 이 나카노 공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할 것입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창문으로 은행나무가 보입니다.

나카노 공장에서 맞는 두 번째 가을입니다.

아침 햇살에 노란 잎사귀가 금화처럼 반짝입니다.

반짝 반짝

팔랑 팔랑

참 예쁘군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빛날 뿐.

내 안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큰오빠의 이름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나는 독립투사, 김원봉의 여동생입니다.

글 유미리

번역 김난주 그림 이즈쓰 히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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