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8>

  • 입력 2009년 1월 14일 03시 02분


일러스트레이션 김한민
일러스트레이션 김한민
버틸 때까지 버텨야 한다. 꺾이고 부서져 병원 신세를 지는 한이 있어도 꼬랑지를 내릴 순 없다.

서령이 미등록 기계팔을 들어 앨리스를 지목했다.

“저, 저 년이… 나보고 가짜라고… 내가 서령이 아니라고.”

찰스가 눈을 부라리며 앨리스를 향해 펄쩍 뛰었다.

그는 ‘망나니’라는 별명답게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걷어찬 후 돈으로 수습하기를 반복했다. 발길질을 당해 죽거나 병신이 된 사람만 백 명을 헤아렸다.

찰스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왔지만 앨리스는 물러서지 않고 눈을 꾹 감은 채 버텼다.

“잠깐만!”

석범이 앨리스 앞으로 나섰다. 찰스는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끼어든 석범을 째려보았다.

“축하쇼 경호 책임을 맡은 보안청 은석범 검사입니다. 초청 인사의 신원 확인은 저희들 임무입니다. 유명인으로 가장하여 테러 및 각종 범죄를 자행하는 범죄조직에 관한 뉴스는 사장님께서도 접하셨을 겁니다. 특히 여배우 서령은 사장님 옆자리에서 축하쇼를 관람할 VVIP이기 때문에 더더욱 철저한 신원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남앨리스 형사는 살인범 45명을 체포한 베테랑으로서 책임감이 투철하고 특히….”

찰스의 변신다리가 낭창낭창 자라더니 그 끝에 삼중 톱날이 양산처럼 펴졌다. 석범은 톱날이 빠르게 회전하자 상황 설명을 그쳤다. 휘청거리는 다리가 채찍처럼 날아든다면 살갗이 찢기고 갈비뼈가 뚝뚝 끊기리라.

석범은 눈을 크게 뜨고 버텼다. 망나니 찰스가 무서워 줄행랑친 검사로 기억되긴 싫었다. 무모할 만큼 자존심이 세다는 면에서, 석범은 ‘9차원 처녀’, ‘막무가시내’ 앨리스와 딱 어울리는 콤비였다.

돌개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들리지 않았다.

실눈을 떴다. 찰스의 변신다리가 슬로모션으로 줄어들었다. 삼중 톱날도 자취를 감추었다. 자연인 그룹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은 찰스로서도 부담이었다. <보노보>의 앞날을 망칠 수는 없었다.

“VVIP의 신원 확인이 필요하면 괜한 짓 말고 즉시 날 불러. 초청 인사에게 친절할 것! 그대들은 경호협정문에 적힌 대로만 하면 돼. 알겠어?”

“알겠습니다.”

“다시 소란을 피울 땐 가만 두지 않겠어, 검사 놈이든 형사 년이든!”

법보다 기계다리가 앞서는 찰스가 서령의 팔짱을 끼고 퉁퉁 퉁퉁퉁 출입문으로 들어갔다. 앨리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뒈지는 줄 알았네. 세 번째 다리가 무슨 자랑이라고 으스대는 꼴이라니…. 특별시장은 뭘 믿고 저 따위 개망나니에게 채널 신설을 허락했죠? 정말 찰스가 시장의 재선을 돕기로 한 겁니까?”

“정직한 사람만 채널을 열 수 있다면 특별시엔 남아 있는 방송국이 없을 걸.”

석범이 시위대의 움직임을 살피며 받아쳤다.

“서령, 드라마에서 저 여자는 왜소 행성인 명왕성에서 토성 남자를 기다리며, 한 해 동안, 그러니까 지구 시간으로 치면 248년 동안 눈물로 지새우더니, 실제론 완전 딴판이네요. 천연몸 대 기계몸 비율을 측정하면 서령도 찰스만큼이나 엄청 바꿨을 겁니다. 찰스가 겉으로 뽐내는 스타일이라면 서령은 완전 내숭이죠. 하여튼 감사합니다, 검사님.”

앨리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석범에게 꾸벅 인사했다.

“다음부턴 남 형사보다 예쁘다고 심하게 다루진 마. 여배우들이 예쁜 게 죈가?”

“내가 언제…?”

“항상 그러잖아. <특별시의 연인>이 인기를 끌 때 여주인공 강소영이 지구에서 25광년 떨어진 포말하우트 비(Fomalhaut b)에서 왔다고 우긴 사람이 누구였더라? <안드로이드 프린스 2호점>에서 여주인공 고금찬은 로봇이 확실하다고 떠벌렸다가 10년 만에 컴백한 감독으로부터 공개 항의를 받은 이는 또 누구였지?”

앨리스는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강소영, 고금찬이 백 퍼센트 천연몸을 지녔다면 이 세상엔 안드로이드가 단 하나도 없겠네요. 그치들은 로봇이나 외계지적생명체 특유의 냉기가 흐른다니까요, 정말! 그런데 검사님이 절 그렇게 보시는 줄 몰랐습니다. 책임감이 투철하고….”

“얻어맞지 않으려면 무슨 말을 못해.”

“그럼 그게 다 거짓말이란 겁니까?”

“그야 나보다 남 형사가 더 잘 알지?”

“뭐라고요? 말 다했습니까?”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다가 동시에 풋, 웃음을 터뜨렸다.

고깔모자형 공연장을 감싼 360도 원뿔 화면에서 <보노보> 개국 축하쇼의 시작을 알리는 로보케스트라의 팡파르가 울렸다.

● 알립니다 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은 지면 게재일 전날 오후 2시부터 동아일보 홈페이지(www.dongA.com)에서 미리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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