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합니다. 화 풀어요. 미안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강연장을 빠져나가면서, 석범은 내내 사과를 했지만 민선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시했다. 계속 말을 붙였지만 침묵과 함께 싸늘한 분위기만 풍겼다. 석범은 옥상주차장 입구에서 그녀의 팔목을 붙들었다.
"이거…… 뭐하는 짓이에요?"
민선이 온 힘을 어깨에 실어 확 뿌리쳤다. 승낙 받지 않은 신체 접촉은 법정 최고형에 처할 수도 있는 중죄였다. 접촉을 통하여 인체에 치명적인 독극물이나 바이러스를 옮기는 사건이 발생한 탓이다. 사랑하는 연인끼리도, 원칙적으로는, 입을 맞추거나 손을 잡기 전에 상대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
혹시 입을 맞춰도 나를 보안청에 고발하지 않으시겠지요?
사랑이 타오를 때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상대에 대한 실례다. 그러나 이혼 수속을 밟는 특별시민의 이혼사유서에서 열에 아홉은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손을 잡고, 허리를 껴안고, 입을 맞췄으며……'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진정해요. 내가 민선 씨 강연이나 들으려고 여기 오지 않았다는 건 짐작하죠? 코를 곤 건…… 미안합니다. 사과할게요. 망할 놈의 악몽 때문에 지난밤에도 잠을 설쳤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1시간 아니 30분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대뇌수사팀의 공식 자문 요청이신가요? 그럼 따로 자문료는 책정되는 것이겠죠?"
민선이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딱딱하게 물었다. 지하주차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특별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 옥상주차장이었다. 주차용 건물을 별도로 올리는 방식이 아니라 자동차와 자동차 사이에 15센티미터 내외의 간극을 두고 서로 밀어내는 힘을 만들어 차곡차곡 쌓는 방식이었다. 바람이나 번개에 영향 받지 않도록 빌딩과 빌딩을 이어 큰 완충망을 설치했다. 나노 단위에서 새로운 연결망을 통해 신물질을 개발했듯이, 실물 크기에서도 사물과 사물의 밀고 당기는 힘을 자동조절하게 된 것이다. 『특별시연합공용어사전』에선 이런 종류의 옥상주차장을 '샌드위치 주차장'으로 따로 분류하고 있다.
"공식적인 자문은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해결할 일이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지요. 자문료는 보안청에서 나가는 건 아니지만 내가 어떻게든 만들어보겠습니다."
"은 검사님 개인 돈을 받으라고요? 됐네요. 뇌물죄로 누구 인생 망치게 할 일 있으신가……. 비공식적인 부탁이라면, 오늘은 여유가 없네요. 글라슈트의 8강전이 끝난 후엔 시간을 만들어보죠."
"시급한 일입니다."
"은 검사님이랑 노닥거릴 시간 없어요."
"노닥거리자는 게 아닙니다. 부탁입니다."
민선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은석범 검사님! 그쪽 혹시 스토커 아닌가요?"
"스토커? 생사람 잡지 마십시오."
"비공식적인 부탁을 할 만큼 우리 사이가 가깝던가요? 그냥 솔직해지는 건 어때요? 총각이 처녀 좋아하는 건 흠도……."
석범이 말허리를 잘랐다.
"착각이 지나칩니다. 비공식적이라 해도 공무의 일환으로 온 겁니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비공식적인 공무다 이거군요. 말은 안 되지만 뭐 그렇다고 해 두죠. 한데 정말 미안해요. 여유가 없다고요."
거절을 당했다고 순순히 물러설 석범이 아니었다. 그는 자동차 전용 엘리베이터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여유가 없다니요? 여기서 민선 씨 아파트까지 20분 남짓 걸리지 않습니까? 딱 20분만 이야기를 합시다. 민선 씨 차는 자동운전으로 보내고, 내 차로 모실 게요."
"됐네요. 강연장에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 차를 뭘 믿고 타겠어요? 난 남의 차는 안 타거든요. 멀쩡한 내 차 놔두고 왜 은 검사님 차를 타요?"
"그럼, 내가 민선 씨 차를 타겠습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 부탁에 응하면, 은 검사님은 제게 뭘 주실 건가요?"
석범은 민선의 반격에 퀭한 눈을 끔벅거렸다. 그녀의 보충설명이 이어졌다.
"내 인생에 공짜는 없어요. 받는 게 있어야 시간을 내드리죠."
"원하는 게 뭡니까?"
석범이 되물었다.
"뭐든지 가능한가요?"
"……뭐든지!"
"그럼 키스……도 되나요?"
"옛?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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