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82>

  • 입력 2009년 4월 29일 13시 49분


부탁도 부탁하는 사람 나름이다. 엉뚱한 부탁일지라도 상대가 마음에 들면 무조건 응하고 볼 것! 별을 따 달라는 부탁 앞에서, 그 부탁의 비과학성을 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그야…… 사라 씨랑 술이라도 한 잔 할까 싶어 <바디 바자르>에 들른 거죠. 은 검사님이 불청객으로 끼어들기에 적당히 둘러대고 그곳을 나왔고요. 사라 씨 숙소에서 마시는 게 편한 듯싶어서 옥탑방으로 올라갔어요."

석범이 장단을 맞추듯 이어받았다.

"하필 그때 테러가 시작되었고, 민선 씨는 서 트레이너 덕분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고."

"맞아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사라 씨가 날 구했죠. W로 단련되었기에 급박한 상황에서도 훌륭하게 대처한 겁니다."

"그 후론 어찌 되었습니까?"

민선은 즉답을 못했다. 잠시 생각이 딴 곳에 머무는 듯도 했다.

"네? 미안합니다만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훨씬 더 친해졌으리라 예상합니다만……."

석범이 말끝을 흐리며 답을 기다렸다. 민선은 낚싯밥을 물지 않고 단칼에 잘라버렸다.

"똑같아요. 가까워지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고. 우린 원래 그래요. 충격적인 일을 겪긴 했지만 그 때문에 일상이 변하는 건 우습잖아요, 애들도 아니고."

우습다?

더 이상 서사라에 관해 묻지 말라는 뜻이다. 석범은 민선이 미꾸라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움켜쥐어도 솜씨 좋게 빠져나가는 한 마리 미꾸라지!

민선이 빤히 그의 두 눈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1분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마감 20초 전엔 블라인드를 올릴 겁니다. 질문이 더 있나요?"

"음…… 그게……."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번졌다. 민선의 도움으로 퍼그의 마지막 기억을 확인했고, 또 지금은 변주민과 이어진 서사라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왔다…… 과연 그것뿐일까. 연쇄 살인으로 얽혀들기 전에, 그는 민선과 카페 UFO에서 단 둘이 만났다. 유쾌하지 않은 맞선 자리였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그녀와 가까워진 느낌이다. 퍼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민선의 눈물을 보았던 탓일까.

블라인드가 올라가고 탁자가 사라지고 의자도 정면으로 돌았다. 나란히 앉게 된 민선이 윗니로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질문 시간 끝났어요. 자, 이제 내 부탁을 들어줘야죠?"

"하나만 하나만 더……."

민선이 빠르고 명랑하게 그의 바람을 잘랐다.

"안 돼요. 더 이상 질문 받지 않겠어요. 내 부탁을 말할 차례니까."

석범은 안경 속 그녀의 두 눈이 무척 크고 맑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 같은 어리광도 밉지 않았다. 약속은 약속이다.

"좋습니다. 뭡니까, 부탁이?"

"나이트메어 클리닉에 참가해주세요. 바야흐로 잠자리에 들 시간이 훨씬 지났네요. 참가방식은 매우 간단합니다. 머리에 여섯 군데 바둑알만한 테이프를 붙입니다. 그리고 잠들었다가 깨면 끝입니다."

"실험은 어디서 합니까? SAIST로 갑니까? 하기야 SAIST는 월화수목금금금 밤낮 없이 연구에만……."

"아니에요.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 연굽니다. 학교 시설을 쓰지 않고 근무 시간 외에 내 개인 장비들만 이용해서 연구를 진행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개인 장비들은 어디 있습니까?"

"당연히 내 집이죠. 건넌방에 따로 실험실을 마련해 뒀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민선 씨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란 뜻입니까?"

석범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민선이 자신의 오른 어깨로 그의 왼 어깨를 툭 쳤다.

"왜요? 혹시 애들처럼 잠자리를 가리는 건 아니죠?"

"……뜻밖이라서 말입니다."

민선이 석범의 '뜻밖'을 자기 식대로 해석했다.

"미안해요. 유의미한 실험이 되려면 꼭 한 명이 더 필요했는데, 마침 은 검사님이 천사처럼 기브 앤 테이크를 하러 오셨네요."

"내가 오지 않았다면 어찌 할 생각이었습니까?"

민선이 차를 세웠다. 개인 실험 장비를 갖춘 숙소에 도착한 것이다.

"강연 참가자 중에서 찾았겠죠. 아니면 지인들에게 지금쯤 연락하느라 바빴을 지도 모르고요. 들어가요 우리."

그녀가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석범은 그녀의 부탁을 곱씹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돌아버리겠네. 나이트메어 클리닉? 악몽을 치료하겠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